[동아광장/김순덕칼럼]사랑하니까 동거한다고?

  • 동아일보
  • 입력 2003년 7월 18일 18시 41분


고양이족이냐, 싱글족이냐.
젊은 층 사이에 새로운 종족이 떴다. 요즘 화제만발인 TV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처럼 동거를 하거나 꿈꾸는 이들이 고양이족이고,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1등에 오른 영화 ‘싱글즈’의 독신남녀가 싱글족이다.
두 집단의 공통점은 일단 ‘쿨’하다는 거다. ‘옥탑방…’에선 하룻밤 사랑 뒤 책임을 지네 마네 궁상떨지 않는다. ‘싱글즈’의 여주인공은 ‘아침밥 해 주고 밤에 서비스해 주면 남편이 학비 대주고 용돈까지 준다’는데도 ‘남의 손 빌려 밑 닦은 것처럼 찜찜해서’ 혼자 사는 것을 택한다. 싱글족은 언제든지 고양이족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호환성이 풍부하다.
▼동거는 가족의 또 다른 형태 ▼
고양이족 바람을 타고 젊은 층일수록 혼전동거에 찬성한다는 의식조사 결과도 쏟아져 나왔다. 암만 사랑한대도 살아봐야 상대방을 알 수 있다는 게 큰 이유다. 아니다 싶으면 동거 단계에서 끝내는 게 이혼율도 줄일 수 있다.
나쁘지 않다. 서로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성인남녀의 관계는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좋다. 전통적 가족제도가 무너진다는 우려도 있지만 동거와 독신은 현대사회의 또 다른 대안가족으로 자리 잡는 추세다. 선악과 상관없이 우리가 기준으로 삼고 있는 미국에서 지난 10년간 가장 많이 늘어난 가족형태가 동거다. 북유럽엔 동거가 결혼만큼 흔하다.
이상한 건 서구에선 이미 행복과는 거리가 있다고 밝혀진 동거가 우리나라에선 쿨하고 선진적인 새로운 삶의 양식처럼 간주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동거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는 한 여대생은 “동거 반대라는 말만 해도 수구 꼴통에 반(反)개혁 반페미니즘적이라고 찍히는 분위기”라고 했다. 남녀가 동등해야 마땅한 터에 여자만 헤프다는 낙인이 찍힐까봐 두려우냐는 비판이 돌아온다는 얘기다.
동거를 예찬하는 그들은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에 이어 ‘결혼 디바이드(Marriage Divide)’란 말이 나온 걸 미처 모르는 모양이다. 미국과 영국에선 결혼 여부가 계층을 알아보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미국의 사회학자 린다 웨이트는 결혼했다는 것만으로도 생활수준이 결혼 안 한 사람보다 3분의 1이 높아진다고 했다.
결혼한 남자는 더 건강하게 오래 살며 돈도 더 번다는 연구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남자만큼은 못 돼도 결혼한 여자 역시 얻는 게 적잖다. 반면 동거커플은 생활형편과 건강 정서가 불안정하고 바람도 더 피운다는 것이 최근 영국 사회조사연구소의 발표다.
더 중요한 건 아이들이다. 동거커플 밑에서 자란 혼인 외 자녀들은 이혼부모의 아이들보다 공부도 못하고 비행에 빠질 가능성도 높다는 거다. 동거와 결혼의 법적 차별이 없는 스웨덴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결혼 문제’의 저자 제임스 윌슨은 지적했다.
“살아보고 결혼한다”는 구호가 환상이 아닌지도 의문이다. 영국에선 첫 동거의 평균 지속기간이 2년에 불과하다. 동거커플 중 결혼에 골인하는 사람은 열명 중 여섯인데 이들 중 35%가 10년 안에 헤어진다. 동거커플이 갈라설 확률은 결혼한 부부보다 서너배 높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사랑하니까 그냥 같이 산다는 말도 못 믿겠다. 지금 내 감정이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는 3대 요소가 친밀감 열정 헌신이다. 동거엔 헌신이 빠져있다. 사랑만 갖고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백년해로가 절체절명의 가치는 아니라 해도, 마음 변하면 언제든지 갈라설 수 있다는 자세로는 삶의 굴곡을 견뎌내기 힘들다. 번거롭게 남들 보는 앞에서 식 올리고 법에다 신고하게끔 결혼제도가 만들어진 것도 웬만하면 참고 살라는 깊은 뜻 때문이지 싶다.
▼내 딸의 행복을 원한다면 ▼
물론 자기 책임 아래 자기 삶을 선택한다는데 타인이 가타부타할 필요는 없다. 각자 열심히 살면 될 일이지 개명 천지에 내 삶의 방식을 남에게 강요하거나 편견으로 대하는 것도 우습다.
다만 내 딸이 고양이족이 되겠다면 결사반대할 작정이다. 인류 탄생 이래 결혼이라는 제도가 이어져 왔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살아갈수록 절감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옛말 그른 것 없고 어른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인간사에 있어선 더욱 그러하다. 이런 걸 왜 나이든 지금에야 알게 됐는지 안타깝지만.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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