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비밀투표…“투표가 뭐지? 물건 사주면 찍을게”

  • 입력 2002년 12월 12일 18시 45분


사진제공 백두대간

사진제공 백두대간

그 여자. 이란의 한 오지 섬에 선거요원으로 파견된 그녀는 투표상자를 옆에 끼고 어느날 홀연히 나타났다. 민주주의의 개념조차 모르는 섬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투표 용지와 후보자의 사진을 내미는 것이 오늘 그녀의 임무다.

그 남자. 섬의 해안선을 지키는 군인인 그는 하루종일 바다를 바라보며 밀수꾼을 적발하는 게 일이다. 아침부터 낯선 여자의 방문에 당황한 그는 그녀를 따라다니며 선거를 도와야 하는게 오늘 그의 임무다.

영화 ‘비밀투표’는 그 여자와 그 남자가 투표일 하루동안 함께 다니며 빚어내는 에피소드를 담은 영화다. 민주주의의 의미를 묻는 심각한 영화인 듯하나 그 과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한다. 정치 영화와 로맨틱 코미디 영화 사이의 줄타기가 계속되지만 조금도 아슬아슬하거나 위험해보이지 않는다. 무관해 보이는 두 장르를 절묘하게 엮어낸 감독의 재능이 돋보이는 작품.

그녀가 투표를 유도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물건을 사줘야 투표하겠다’는 상인, ‘외간 남자 얼굴을 볼 수 없다’며 후보자 사진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여성, ‘신만이 세상을 구원한다’며 신을 찍겠다고 우기는 할아버지 등에 부닥쳐 그녀의 논리적 설득은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올 뿐이다.

똑같은 설명을 반복하며 주민의 참여를 이끄는 그녀의 모습을 롱테이크로 처리해 관객에겐 다소 지루함을 안겨주지만 민주주의에 도달하기까지 소요되는 인내와 끈기의 지난한 세월을 암시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엿보인다.

무거운 전개 속에 남녀의 알콩달콩한 사랑이 꽃피는 공간은 그가 그녀와 투표함을 실어나르는 지프 안이다. 그녀와 투표함을 호위해야 한다는 명령이 처음부터 마뜩찮았던 그는 사사건건 그녀와 부딪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별 소득 없이 다시 차에 올라타는 그녀를 제법 위로할 줄도 안다.

길고 긴 여정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그가 투표할 차례. 그는 “선거가 좀 더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사랑고백을 대신하고 투표용지에 그녀의 이름을 적는다. “나는 후보가 아니다”는 그녀의 말에 그의 대답은 간단하다. “비밀투표 아니었던가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칸다하르’의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이 이란 영화의 거장이라면 이 영화를 만든 버박 파여미는 이란 영화의 차세대 선두주자로 꼽힌다. 2001년 베니스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전체관람가. 19일 개봉.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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