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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2월 12일 20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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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영화이지만 ‘라이언…’이 줄거리가 분명한 통속 소설이라면 ‘씬 레드라인’은 명상적인 시화집과도 같다. 군인들의 희생을 가치있는 결과로 보상하는 ‘라이언…’과 달리 ‘씬 레드 라인’은 아무런 위안도 주지 않은 채 전쟁과 그것을 야기한 인간 본성에 대해 묵상하도록 요구한다. 이야기의 자잘한 맛과 적당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즐거움은 없지만 오래도록 묵직한 슬픔을 느끼게 하는 영화다.
태고의 자연을 간직한 태평양의 섬, 자연과 일체가 되어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평화로운 정경. 이 첫 장면에서 감독이 생각하는 이상향은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일본군 점령의 과달카날섬을 미군이 탈환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면서 이상향은 교란되기 시작한다. 닉 놀테, 우디 해럴슨, 숀 펜, 존 트래볼타, 조지 클루니 등 할리우드의 주연급 스타들이 얼굴을 비치지만 누가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에는 대사보다 군인들의 심리적인 갈등을 표현하는 방백(傍白)이 훨씬 많다. 어찌 보면 그것은 전쟁이라는 끔찍한 악을 일으킨 인간의 잔혹한 본능에 절망하는 감독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모두가 공포에 질려있는 전장에서 아내를 떠올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하는 군인들의 정신분열적인 망상은 환각제처럼 현실의 고통을 견디게 만든다. 그러나 현실은 그 환각조차 오래 허용하지 않는다. 여지없이 꿈을 배반하는 현실의 냉혹함, 벨(밴 채플린)이 아내에게 버림받고 이상주의자인 위트(짐 카비에젤)가 포위되어 죽는 장면은 그래서 더 비애감이 넘쳐난다.
가장 관념적인 전쟁영화이지만 전투장면의 사실성은 빼어나다. 군인들이 몸을 숨긴 풀밭의 잎사귀 풀벌레까지 포착한 섬세한 영상은 낮은 포복으로 전진하는 병사들의 눈높이에서 촬영해 긴장과 공포, 피를 말리는 기다림까지를 모두 담아냈다. 제목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가느다란 붉은 선만큼 얇다는 뜻.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