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등뒤에서 시퍼런 칼이 내려온다. 내뿜는 피와 부릅뜬 눈. 그의 정치적 이상도 검붉게 물든 채 역사가 된다. 이방원 살생부의 첫이름에는 「상황 끝」을 알리는 굵은 먹빗금.
KBS 1TV 「용의 눈물」에서 사생결단의 기세로 마주 달려온 이방원과 정도전의 정쟁이 25일(53회) 결판났다. 1차 왕자의 난. 어린 세자 방석의 목도 배다른 형 방원의 칼에 달아났다.
용이 뭐길래….
「용의 눈물」은 용들의 전쟁을 그려내며 「남성 드라마」로 자리잡았다. 시청률 조사기관 MSK에 따르면 남성 시청자가 47%. 남성들이 TV앞에 모여들기는 드문 예다. 이전의 「모래시계」나 「한명회」 정도가 고작이었다.
특히 최근 한달 양 진영의 고조되는 긴장은 남성 시청자들을 조바심나게 했다. 정도전의 패배는 역사의 사실이지만 생사가 엇갈리는 시기는 정쟁 드라마의 절정.
김태완씨(36·회사원)는 『지난 18일 정도전이 죽을 것 같아 일산 집까지 시속 1백㎞로 달려갔다』며 『그러나 이 대목의 물타기가 오래가서 짜증날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왜 남성들이 몰릴까.
「용의 눈물」을 97년 정국과 오버랩시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시청자들은 상황은 다르나 현 정국에서 용틀임하다 더러 눈물 흘리는 용의 모습을 떠올리며 권력의 무상을 빗댄다.
또 용의 자리를 둘러싼 치밀한 술수 등이 샐러리맨 세계의 확대판이라는 이유도 있다. 직장내 크고 작은 권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편가르기」와 「상대 죽이기」의 외연(外延)이기 때문에 더욱 시선을 모았다는 것.
1백회 중 절반을 넘은 「용의 눈물」은 앞으로도 권력의 발톱이 그리는 무자비한 변화로 남성 시청자들을 사로잡을 구상이다. 함흥차사로 비유되는 이성계와 방원 부자의 원한, 형제끼리의 피 튀기는 2차 왕자의 난, 남편이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한 뒤 삭발 입산하는 경순 공주, 민무구 형제 등 처가를 도륙하는 태종, 정종의 하야를 부추기는 하륜, 천하를 떠돌며 타고난 무인기질을 삭이는 양녕대군 등.
10월말부터 등장하는 세종대왕을 통해서 이상적인 지도자상을 그리는데 이 또한 대선이 얼마 안남은 시점이어서 「절묘한 현실」이 될 것이다.
〈허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