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게 빛나는 AI 반도체 칩(AI EXUBERANCE) 아래로 신용 스프레드가 2007년 금융위기 직전 수준까지 급락했음을 알리는 붉은색 하락 곡선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AI 랠리의 이면에 숨겨진 채권 시장의 위험 신호를 시각화한 것. 제미나이 AI 생성 이미지
주식 시장이 인공지능(AI) 랠리에 다시 베팅하는 사이, 채권 시장에서는 정반대의 신호가 켜졌다.
기업 부채의 위험도를 보여주는 신용 스프레드(기업 채권과 국채 간 수익률 격차)가 수십 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까지 내려오자, 글로벌 은행 HSBC는 “AI에 대한 작은 실망 하나만으로도 신용 시장 전반에 파장이 번질 수 있다”며 투자자들에게 경고를 보냈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과 유사한 가격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3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HSBC 전략가들은 최근 보고서에서, 현재 신용 시장의 낙관론이 “매우 좁은 기반 위에 세워져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경제 성장의 상당 부분이 AI 투자와 AI 관련 주식 상승에 따른 자산 효과(wealth effect)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기대가 꺾일 경우 충격이 채권 시장으로 직격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HSBC는 신용 스프레드가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의 축소 국면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원문: “Corporate bond spreads are near their tightest levels since the run-up to the 2007 global financial crisis.”)
● AI에 저당 잡힌 성장, 낮아진 ‘위험의 가격’
HSBC의 송진 리(Song Jin Lee), 톰 러셀(Tom Russell) 전략가는 “최근 미국 GDP 성장의 상당 비중이 AI와 직결돼 있다”며 “직접적인 투자 지출뿐 아니라, AI 관련 주가 상승이 만들어낸 자산 효과가 소비와 금융 시장을 떠받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문제는 이 낙관론이 채권 시장에서 ‘위험의 가격’을 희미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신용 스프레드는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이후 가장 낮은 수준까지 좁혀졌다. 투자자들이 지정학적 리스크와 고금리 환경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준거 금리(국채 금리 등 절대 금리)를 좇아 기업 부채로 몰리고 있다는 뜻이다.
HSBC는 “현재 가격은 이미 가장 온건한(benign) 시나리오를 완전히 반영하고 있다”며 “하지만 이 낙관론이 서 있는 기반은 매우 제한적”이라고 경고했다.
● 빅테크 채권 발행 확대, 스프레드를 다시 벌릴 변수
리스크 요인 중 하나는 미국 기술 기업들의 대규모 채권 발행이다. AI 투자 확대를 위해 빅테크 기업들이 수십억 달러 단위의 회사채를 시장에 내놓으면서, 채권 공급 증가가 가격 하락(금리 상승)과 신용 스프레드 확대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HSBC는 “설령 AI에서 추가적인 ‘깜짝 호재’가 나오더라도, 그 과실은 채권 보유자가 아니라 주식 보유자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채권의 수익 구조상 상승 여력(Upside)은 제한적인 반면, 부도 위험 등 하방 리스크(Downside)에는 비대칭적으로 노출돼 있다는 의미다.
● “가장 약한 고리는 신용이다”
골드만삭스도 비슷한 진단을 내놨다. 크리스티안 뮬러-글리스만(Christian Mueller-Glissmann) 골드만삭스 자산배분 책임자는 최근 블룸버그 TV 인터뷰에서 신용 시장을 “현재 금융 시장의 가장 약한 고리(the weakest link)”라고 표현했다.
그는 특히 저금리 달러와 엔화를 빌려 자산을 매수했던 투자자들이, 빚을 갚기 위해 물량을 한꺼번에 던지는 ‘캐리 언와인드’ 상황을 우려했다. 주식은 실적이 나쁘지 않으면 버틸 수 있지만, 현재 채권 시장은 위험에 비해 보상이 너무 적어 작은 충격에도 투자자들이 쉽게 이탈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HSBC는 투자자들에게 미국 기술 기업 채권에 대한 투자 비중(노출)을 줄일 것을 권고했다. 대신 AI 열풍의 영향권에서 한발 비껴나 있는 유럽 회사채나, 신용도가 높은 아시아 우량 기업(투자등급) 채권으로 자산을 분산하라는 조언이다.
또한 은행을 통하지 않고 기업에 직접 자금을 빌려주는 ‘사모 신용(Private Credit)’ 시장의 위험성도 지목했다. 이 시장의 자금이 주로 수익률은 높지만 위험한 소프트웨어 업체들에 쏠려 있는데, AI 기대감이 꺾일 경우 이 기업들의 부실이 대출 시장 전반의 충격으로 번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 주식 시장의 낙관론, 신용 시장의 경고음
AI 열풍은 여전히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투자은행들이 내놓은 경고의 본질은 하나다. 주식 시장은 화려한 축제에 취해 있지만, 기업들의 돈줄이 오가는 ‘신용 시장’은 이미 소리 없이 타오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기업 부채에 대한 경계심이 완전히 느슨해지며 신용 스프레드가 축소될 때는 자산 거품이 한계 국면에 접근했음을 알리는 신호로 해석돼 왔다. AI 랠리가 ‘진정한 성장’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조정’의 국면으로 돌아설지는, 화려한 주가 지수보다 리스크를 먼저 반영하는 이 채권 시장이 선행 지표가 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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