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믿고 한번 바꿔보시죠”…노년층 울리는 ‘불완전 판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8일 14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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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고객님이 선배시지만 주식은 제가 선배잖아요. 저 믿고 한번 바꿔보시죠.”

“제가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물론 정부 관계부처 고위직 분들도 모시고 있거든요.”

삼성전자 기술직으로 20년 이상 근무하며 꾸준히 회사 주식을 사모아 온 강모 씨(67). 강 씨의 자산관리를 돕던 A증권사 프라이빗뱅커(PB)는 그가 노후 대비용으로 수십 년 묵혀온 삼성전자 주식을 자꾸만 팔라고 권했다. 강 씨는 이를 몇 차례나 뿌리쳤지만 PB는 끈질기고 집요했다. 2016년 초에 보름 가까이 연일 전화를 걸어와 종목 교체를 권유하자 점차 강 씨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강 씨는 삼성전자 우선주 1200여 주를 팔고 대신 호텔신라 주식을 매수했다. PB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재차 전화를 걸어 강 씨의 배우자가 보유 중이던 한화 주식을 매도하고 삼성SDS 등으로 갈아타게 만들었다. ‘초저위험 투자형’인 강 씨 배우자의 투자성향은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PB 말을 따른 대가는 참혹했다. 삼성전자는 수시로 신고가를 경신한 반면 갈아탄 주식은 줄곧 하락세를 보였다. 결국 1년여 만에 강 씨는 4억5000여 만 원, 배우자는 1억3000여 만 원의 평가손실을 봤다. 자신감 넘치던 PB는 기다려보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전화를 피했고 속을 끓이던 강 씨는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에 분쟁조정을 신청했다. 시장감시위원회는 “직원의 투자 권유 형태나 방식이 지나쳤다. 초저위험 투자형인 강씨의 배우자에게 주식매매를 권한 것도 ‘적합성 원칙’을 위반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A증권사에게 손해의 일부인 5500여 만 원을 배상하라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강 씨는 “증권사에 ‘면죄부’를 줄 수 없다”며 이 같은 조정 결정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 씨는 “노인들을 꼬드겨 괜히 주식을 사고팔게 만들고, 가운데서 수수료를 챙기는 증권사의 행태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인구 고령화와 저성장 국면이 본격화하면서 보다 높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금융투자에 나서는 어르신이 늘고 있다. 동시에 금융회사의 불완전판매나 잘못된 투자 권유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도 증가하는 추세다. 불완전판매는 상품에 대한 기본 내용이나 투자 위험성에 대한 안내 없이 금융상품을 파는 행위다. 수수료 수익을 노린 금융회사들이 금융지식이 부족한 고령층을 위험한 투자로 내몰며 노후자금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노년층 울리는 ‘불완전 판매’

요즘 고령 투자자들의 관심은 일반적인 주식, 펀드는 물론이고 투자위험이 그보다도 높은 파생상품에까지 뻗치고 있다. 은행 이자가 연 2%대에 불과하다보니 적극적인 투자를 해서라도 노후자금을 불려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말 기준 ELS(주가연계증권) 등 파생결합증권 발행 잔액 101조 원 중 개인투자자 투자금액은 47조2000억 원. 이중 60대 이상이 투자한 금액은 41.7%에 달했다. 마땅한 투자처가 없다보니 안정적인 투자성향을 보이던 60대 이상 고령 투자자들도 대거 ELS 투자에 뛰어든 것이다.

문제는 복잡한 상품구조와 투자 위험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채 투자에 나서는 고령층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의 금융이해력 점수는 평균 62.2점으로 특히 70대(54.2점), 60대(59.6점)가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금융국장은 “투자설명서를 읽고 계약서에 사인은 하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상품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라며 “젊은 투자자들은 손실을 보더라도 계속해서 소득이 발생하니 이를 만회할 수 있지만 노년층은 노후자금에 손실을 볼 경우 바로 생활에 타격이 온다”고 지적했다.

주부 이모 씨(59)는 지난해 ‘중위험 중수익 상품’이라는 은행 직원의 추천에 당시 인기를 끌던 ‘양매도 상장지수증권(ETN)’ 상품에 가입하려다가 상품설명서 내 ‘최고위험’이라는 문구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알고 보니 양매도 ETN은 지수가 일정 범위에서 움직일 때는 수익을 내지만 지수가 범위를 벗어나 급등하거나 급락할 때는 손실이 나는 복잡한 구조의 상품이었다. 이 씨는 “예금을 넣어봤자 수익이 너무 적으니 투자 상품을 알아보다 추천을 받았는데 아무리 은행원의 설명을 들어도 상품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라며 “나에게 왜 이렇게 복잡하고 위험한 상품을 추천했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더불어민주당 최운열 의원실에 따르면 KEB하나은행에서 2017년 11월부터 2018년 8월까지 8283억 원 어치의 ‘하나ETP신탁 목표지정형_양매도 ETN(상장지수증권)’이 팔렸다. 이 가운데 73%가 50대 이상에게 판매됐다.


● 고령투자자 보호 규정 있지만 현장에선 잘 안 지켜져

이런 실버 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근 들어 각종 제도가 잇따라 도입되고 있다. 고령투자자에 대한 보호제도에 따라 2016년부터 금융회사들은 고령투자자 전담창구를 마련하고 파생결합상품 투자를 권유할 때는 관리직 직원(지점장 또는 준법감시인)의 사전확인을 거쳐야 한다. 또 2017년 도입된 숙려제도는 부적합 투자자나 70세 이상 투자자가 상품 구조 및 투자위험 등을 충분히 숙지하고 투자결정을 할 수 있게, 금융투자 상품 청약 후 2영업일 이상 숙려기간을 투자자에게 주도록 하고 있다. 적합성 보고서 제도는 고령투자자에게 파생결합상품 투자를 권유할 때 권유 사유 등을 기재한 보고서를 반드시 작성해 제공토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금융회사들이 이런 제도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다보니 실효성이 떨어지고 있다. 금감원이 지난해 미스터리 쇼핑(고객으로 가장해 서비스 평가)을 통해 ELS 등 파생결합증권 판매실태를 점검한 결과 은행들은 고령투자자 보호와 관련된 항목들에서 대부분 낮은 점수를 받았다. 특히 숙려제도(34.0점)와 고령투자자에 대한 보호제도(35.7점), 적합성 보고서 제도(38.4점) 등은 100점 만점에 30점대의 ‘낙제점’을 받았다. 금융당국의 점검 결과, “예전에 ELS 투자 해 보셨죠?”라며 투자성향을 정확하게 확인하지도 않고 일단 판매부터 하고 보려는 은행도 적지 않았다.

금융회사들에 대한 감독도 중요하지만 고령자에 대한 금융교육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도영석 금감원 금융교육국 수석조사역은 “노년층 등 취약계층의 금융이해력을 높이기 위해 유관기관들과 함께 경제·금융교육을 강화할 예정”이라며 “금융소비자들도 원금손실 가능성 등 투자위험에 더 각별히 유의해 달라”고 당부했다.

장윤정기자 yun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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