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백성들의 민원은 어떤 방식으로 처리됐을까?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단어는 신문고일 것이다. 그런데 신문고는 잠깐씩 시행했던 것이라 제도라고 말하기 힘들다. 가장 보편적인 민원은 ‘상소’였다. 상소는 훌륭한 제도였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한번은 조선 후기 서울 종로에 있던 ‘혜전(鞋廛)’이라는 가죽신을 만드는 가게에서 비변사(備邊司)에 이런 상소를 올렸다. ‘정부 관청에서 수시로 공문을 보내 행사에 필요하다며 신발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데, 이런 요구를 모두 들어주면 파산할 지경이고 들어주지 않으면 여러 방법으로 괴롭혀서 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혜전만 이런 일을 당한 건 아니었다. 모든 시전(市廛)에서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어떤 관청에선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가 놓고는 절대 갚지 않는 방식으로 상인들을 괴롭히곤 했다.
민원 상소를 접수한 비변사에선 상인들에게 ‘부당한 공문은 거부하고, 그런 공문을 내린 관리는 장계하고, 가게에 와서 행패를 부리거나 물건을 받아간 하인은 처벌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간단히 말해 ‘법대로 하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조치가 과연 현실적인 방법이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법대로 하면 되는데 법이 지켜지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과연 시전 상인들이 부당한 요구를 실제로 거부할 수 있었을까. 권력 있는 관청의 하인들은 대놓고 마치 자기가 고위 관료나 된 것처럼 똑같이 유세를 부리고 트집을 잡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전 상인들이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면 심한 보복을 당할 게 뻔했다.
법 자체에도 문제가 많았다. 조선은 국가재정으로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겠다며 조세를 낮추고 관청에 예산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각 관청이 알아서 물건을 조달해서 쓰라는 식이었다. 필요한 물건은 시전에서 공짜로 받아 사용하게 했고, 그 대신 시전에는 특정 상품에 대한 판매 독점권을 줬다. 애초에 법과 제도 자체가 권력의 횡포와 남용을 조장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조선 후기에 공물제도를 폐지하고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공인(貢人)’이라는 새로운 상인이 등장했다. 이들은 과거에 공물로 조달해 오던 물품을 지방에서 직접 구입해서 궁궐이나 중앙의 각 관청에 납품했던 공납청부업자였다. 이런 공인들도 시전 상인과 마찬가지로 독점권을 넘겨받고 독점권의 대가로 이런저런 준조세에 해당하는 부담을 감당해야 했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영조가 드디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1752년(영조 28) 영조는 ‘공시당상(貢市堂上)’이라고 불리는 시전 상인과 공인들을 위한 고충처리반을 만들었다. 박문수의 건의로 재정을 담당하는 양대 관서인 호조판서와 선혜청 당상이 공시당상을 겸임하게 됐다. 이들은 공인과 시전 상인에게 폐단을 하나하나 물어서 영조에게 보고했다.
호조판서와 선혜청 당상이 높은 자리기는 했지만 영조는 이들이 권력형 부패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을지에 의문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영조는 직접 나섰다. 아예 시전 상인과 공인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직접 대면한 것이다. 1769년(영조 45) 상인들이 영조를 만나는 자리에서 “임금의 인척인 낙창군 이탱(1200냥), 청성위 심능건(1100냥)을 비롯해 홍자(2500냥), 송낙휴(1500냥) 등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이 돈을 빌리고 아직도 갚지 않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이 중 심능건은 영조의 딸 화녕옹주의 남편, 다시 말하면 영조의 사위였다. 영조는 즉시 홍자, 송낙휴 등을 잡아서 처리하고 인척들도 일단 잡아 가둔 뒤에 돈을 다 갚으면 풀어 주겠다고 했다. 한발 더 나아가 고위 관료들의 부정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시당상 김시묵과 김종정까지 파직했다.
이처럼 영조는 열린 채널을 확대하고 상인들이 스스럼없이 고충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시전 상인과 공인들이 연초나 연말에 궁궐에서 임금을 직접 만나 자신들의 어려움과 폐단을 말하는 자리를 정례화한 게 대표적인 예다.
물론 왕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부정이 완전히 사라지기는 어렵다. 왕이 1년에 몇 차례 상인들을 만나서 그들의 소리를 직접 듣는다고 해서 매일같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부정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더가 끈기와 의지를 보이면 결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질적인 대책을 찾아내는 사람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런 인재를 발굴해 해결책이 만들어지고 시행되면 ‘변화’가 생겨난다. 영조가 상인들을 면담하고 직접 고충을 들었던 진정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법과 관행에 안주하지 말고 현장에 뛰어들어 문제와 해결책을 찾아내라.’ 오늘날 기업의 경쟁력은 한두 사람의 노력, 한두 사람의 인재로 해결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조직원이 이런 자세를 가지고 노력하느냐, 기업이 그런 노력을 독려하고 장려하는 분위기를 갖추고 있느냐의 싸움이다. 이것이 진정한 경쟁력이자 지속적인 성장의 비결이다.
노혜경 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hkroh68@hotmail.com 이방실 기자 smi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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