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 남쪽에 있는 자버 시장의 풍경. 이곳 도매업체의 80%를 장악한 한인들은 싸구려 옷에서 디자이너 브랜드로 변신하는 중심에 서있었다. 로스앤젤레스=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미국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 남쪽에 있는 ‘자버 시장(jobber market)’은 여러 개의 어원(語源)을 갖고 있다. 크게 일용직 근로자를 뜻하는 자버(jobber)에서 비롯됐다는 설과 ‘땡처리’ 물건을 뜻하는 속어에서 유래했다는 설로 갈린다.
어느 쪽이건 그동안 자버 시장의 이미지는 ‘싸구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80년대부터 한인이 정착하며 ‘미국의 동대문시장’이라는 별명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이런 자버 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 중심엔 한국인들이 있었다.
○ 싸구려 티셔츠에서 디자이너 브랜드로
여의도 면적(2.9km²)만 한 자버 시장은 입주한 도매업체 1700여 곳 중 80%를 한인이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 유대인이 이곳에 의류도매점을 열며 터를 잡았지만 1980년대 미국으로 건너간 한인 1세대가 사업을 시작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춰 나갔다.
한인들은 타고난 근면성과 손재주로 자버 시장에서 제품을 만들었고, 이는 북미 시장과 남미 대륙으로 무섭게 팔려나갔다. 저가 티셔츠를 대량으로 생산 판매해 막대한 부(富)를 쌓은 한인 사업가도 적지 않다. 미국을 대표하는 의류 체인점 ‘포에버21’의 시작도 1980년대 초반 이민 온 장진숙 씨가 자버 시장에 연 옷 가게였다.
최근 불고 있는 변화는 가업을 물려받은 한인 2세대와 뒤늦게 이곳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이 주도하고 있다. 뛰어난 디자인 감각과 손재주를 발휘해 자체 브랜드를 단 옷들이 저가(버짓 라인·Budget line)가 아닌 중고가(베터 라인·Better line)로 대접받으며 자버 시장에서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1997년부터 이곳에서 ‘에슬리(Esley)’라는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는 스티브 리 씨도 그중 한 명이다. 17일 만난 이 씨는 “중국인들이 자버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하며 저가 의류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바람에 이름 없는 싸구려 옷을 파는 것보다 독창적인 디자인과 뛰어난 품질로 부가가치를 높여야겠다는 인식이 젊은 사업가 사이에 번지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브랜드 파워를 키우기 위해 마케팅과 홍보를 전담하는 팀을 꾸리는 한인들도 있다.
○ 중고가 제품으로 미국 내 백인층 겨냥
중남미 소비자나 미국 내 히스패닉이 대부분이었던 자버 시장의 타깃 계층도 변하고 있다. 5월 자버 시장에 문을 연 ‘도로시USA’는 아예 미국 내 백인들을 겨냥한 상품을 전면에 내세웠다. 미국 경기가 침체되며 고가 브랜드 옷의 인기가 사라진 것은 자버 시장 상인들에게 기회로 작용했다.
도로시USA의 장호현 매니저는 “미국 내 대형 체인스토어들이 품질이 좋고 가격도 합리적인 제품을 만드는 자버 시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며 “디자인과 사업 마인드를 가진 고급 인력과 자본이 자버 시장으로 흘러들고 있다”고 말했다. 12년째 이곳에서 영업 중인 ‘파이널 터치’는 백인의 취향을 반영한 ‘어번 라인’ 의류를 미국 내 개인 부티크에 공급하며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자버 시장에서 주목받는 제품을 한국 시장에 소개하는 업체도 등장했다. 한국에 본사를 둔 ‘모임’이라는 업체는 최근 자버 시장의 도매상과 협업해 생산한 의류 브랜드 ‘터치’를 한국 내 인터넷쇼핑몰과 백화점 매장에서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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