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비상경영 몸부림치는데… 정부는 ‘번트’급 대책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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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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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급력 큰 정책 실종… 경제상황 인식 논란

산업계가 현 상황을 심각한 위기로 보고 너도나도 비상경영에 나서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 정부의 경제상황에 대한 인식이나 정책대응은 너무 한가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정부가 지엽적이고 효과가 제한적인 ‘번트형’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데 대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

본격적인 위기에 대비해 힘을 아껴야 한다는 정부의 논리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산업구조 개편이나 서비스업 규제 완화 등 정부가 할 수 있는 일까지도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 태풍급 위기에 번트급 대책

소문난 야구광(狂)인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요즘 ‘스몰볼(small ball)’이라는 야구용어를 자주 입에 올린다. 스몰볼은 장타나 홈런 같은 ‘한 방’보다는 도루나 단타, 번트 등 작은 작전을 축으로 팀플레이를 극대화하는 전술이다.

최근 정부의 경제정책도 거시경제의 전체 방향을 수정하는 중량감 있는 정책 대신에 작지만 피부에 와 닿는 규제 완화, 기존 정책의 부분 수정 등 미세조정에 집중하고 있다.

‘스몰볼’의 신호탄은 올 5월 정부의 ‘5·10 부동산대책’이었다. 이때 정부는 서울 ‘강남 3구’를 투기지역에서 해제했지만 정작 부동산업계가 간절히 원했던 총부채상환비율(DTI) 완화 등 핵심 규제는 풀지 않았다. 정부는 6월 말 발표한 경제정책 운용방향에서도 일부 정치권과 학계에서 요구해 온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을 하반기 과제에서 제외했다. 그 대신에 공기업 등을 통한 8조5000억 원의 추가 재정투자로 경기를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이달 초 발표한 세법개정안에서도 ‘미세조정 기조’는 이어졌다. 정부는 소득세 과세표준 구간 조정 및 종교인 과세 방안을 막판까지 고심하다가 결국 개편안에서 뺐다. 박 장관은 “과표 구간을 조정하려면 비과세·감면도 대폭 줄여야 하는데 큰 정치일정(대선)을 앞두고 힘들 것이라 판단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임기 말에 세제 정책의 주도권을 제 손으로 국회에 넘겨준 셈”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달 17일 내놓은 내수활성화 대책에선 수도권 입지와 의료, 보험업 등 일부 규제가 풀렸지만 서비스업 규제 완화, 일자리 문제 등에서 눈에 확 띄는 정책이 없었다. DTI 조정 역시 전반적인 완화 없이 특정 계층에 한해 살짝 ‘손을 보는’ 것으로 정리됐다. 최근 국제 곡물가격 상승에 대한 대책도 할당관세 인하나 수입 확대 등 대증(對症)요법에 집중되고 식량자급률을 끌어올리는 등의 근본적인 대책은 구체화되지 않았다.

○ 시장에선 경기활성화 의지 의심

잇단 ‘스몰볼’ 정책에 대해 많은 경제전문가는 “정부가 필요할 땐 ‘강공(强攻) 작전’도 써야 하는데 번트만 대고 있으니 정책 효과가 떨어진다”고 비판하고 있다. 임기 말에 정부가 위기의 ‘관리’ 측면에만 집중하다 보니 침체에서 벗어날 중장기, 대형 대책이 실종돼 자칫 경기 반전의 타이밍을 놓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들은 현재의 경제상황이 ‘스몰볼’ 정책만으로 해결될 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민간에서 바라본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2%대 중반 정도까지 떨어졌고 소비·생산·투자 등 지표도 하락 추세를 이어가고 있다. 대기업들은 저마다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한 가운데 가계부채와 높은 수출의존도 등 경제의 고질적인 문제도 여전하다. 대외적으로도 유로존이 올 2분기에 전 분기 대비 마이너스 성장(―0.2%)을 했고 중국 브라질 등 신흥국 경제도 감속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오정근 고려대 교수(경제학)는 “지금 미국 학자들 사이에서도 ‘뉴(new) 뉴딜 정책’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며 “올해 성장률이 잠재성장률보다 최대 1.5%포인트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과감하고 선제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고만고만한 대책만 양산되다 보니 일부에선 정부의 경기진작 의지 자체를 의심하기도 한다. 경제 관련 회의도 많고 그만큼 대책도 분야별로 대량으로 쏟아지지만 발표되는 정책들의 강도가 하나같이 시장이 반응할 수 있는 ‘역치’를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가 지난달 말부터 산업계에서 접수한 건의과제는 150건이 넘고 지금까지 그중 28건이 정책으로 반영됐다. 정부는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회의를 열고 매번 수십 건의 대책을 쏟아낼 예정이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부동산 정책만 해도 현 정부 들어 약 20차례나 나왔지만 매번 아주 조금씩만 규제를 풀다 보니 되돌아보면 마땅히 기억에 남는 게 없다”며 “시장이 더 버틸 수 없을 때마다 마지못해 정책을 내놓은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고 진단했다.

○ 정부 “위기 장기화, 내실을 다질 때”

물론 정부도 고민은 있다. 2008년처럼 갑작스러운 경기 하강이 찾아오지 않고 침체가 장기화되는 국면이라 대규모 추경이나 큰 폭의 금리 인하 등 경기부양 카드를 함부로 꺼내 들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는 장마처럼 길고 깊게 이어질 위기에 대비하려면 ‘스윙이 큰’ 정책을 남발하기보다 경제의 내실을 다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논리를 편다.

이를 두고 박 장관은 “위기가 장기화되는 지금은 전면적, 일시적 정책보다는 실책을 최소화하며 기회를 잡아 세밀하게 점수를 내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비유적으로 설명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경제학)도 “현 국면에선 무리하게 성장률을 끌어올리려다 급격한 재정악화를 야기할 수 있다”며 “통화정책은 몰라도 재정정책은 지금처럼 선별적으로 신중하게 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기업인들의 건의도 듣고 정책 아이디어도 꾸준히 발굴하고 있다”며 “앞으로 작지만 의미 있는 정책들은 계속 생산해 내겠지만 현재로서는 정책기조를 크게 흔들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기업#비상경영#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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