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세 무경력으로 신입 공채 합격한 비결은…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17일 21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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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학력-전공 제한 없는 ‘블라인드 테스트’
신입사원 283명 중 30세 이상이 50% 차지

"자네, 올해 나이가 몇인가?"

4월 30일 경기 성남시 한국토지주택공사(LH) 본사. LH 이지송 사장이 토지공사와 주택공사 통합 후 처음 실시된 신입사원 공개채용의 최종 합격자 280여 명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었다. 그 순간 묵묵히 임명장을 나눠주던 이 사장의 손이 한 신입사원 앞에서 멈칫했다. 얼굴과 명찰, 임명장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이 사장은 나지막하게 나이를 물었다. 이 사장의 눈길을 끈 신입사원은 황지훈 씨(36)였다. 황 씨는 "나이가 많은데다 외모까지 중후해 사장님이 조금 놀란 눈치였다"며 "나중에는 동기들로부터 '대체 사장과 무슨 말을 주고 받았냐'며 질투 아닌 질투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런 해프닝은 LH가 사원을 모집하며 나이, 학력, 전공에 제한을 두지 않은 '블라인드 테스트'를 도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LH의 블라인드 테스트는 '표현대로' 철저하게 진행됐다. 심사 과정에서 개인 신상에 대한 질문은 금지됐고, 지원자는 면접 때 경력이나 나이, 학력을 말하면 감점 조치됐다. 그 결과 공기업 입사를 꿈꿨던 '장수생(나이가 많은 수험생)'이 대거 합격하는 기쁨을 누렸다. 283명의 합격자 중 30세 이상 신입사원의 비율만 50%에 이르렀다.

최고령 합격자인 송재일 씨(37)도 마찬가지다. 그는 2008년 결혼해 딸과 아들을 둔 두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송 씨는 2005년 대학원을 졸업한 후 한국전력공사의 한 자회사를 다니다 LH 입사 준비를 위해 올해 초 퇴사했다. 송 씨는 "평소 도시재생 사업에 관심이 많아 LH에서 일했으면 했다"며 "요즘엔 차를 타고 가다 회사 로고가 보일 때면 아이들이 먼저 '아빠 회사다'고 소리친다"며 뿌듯해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다 공기업 입사로 진로를 바꿔 올해 LH의 신입사원이 된 이상훈 씨(36)는 공기업 입사자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인사가 됐다. 그는 공기업 수험생이 즐겨 찾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36세, 무경력으로 LH 채용에 합격했습니다"는 내용의 합격 후기를 남겨 화제를 모았다. 그는 후기를 통해 "학점이 좋은 편이 아닌데 이번 채용에서 학점 항목이 이력서에 없어 유리했던 것 같다"며 "이 글을 읽고 다른 수험생들도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의 후기에는 50개가 넘는 답글이 달렸다. 대부분 "희망이 생긴다"는 내용이었다. 이 씨는 "나이가 많아 공부를 포기하려던 수험생들이 합격 후기를 읽고 용기를 얻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벅찼다"며 "블라인드 테스트를 도입하는 곳이 앞으로 계속 늘어나 더 많은 청춘들이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희망을 전했다.

신입사원 황지훈 씨는 "필기와 면접을 거치며 LH의 채용 과정이 굉장히 투명하다는 생각을 했다"며 "다른 공기업들도 이런 채용 시스템을 도입해,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취업기회마저 갖지 못한 채 절망 속에 살아가는 취업 준비생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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