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상권, 호랑이 물리쳤더니 여우가 꿰찬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5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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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집-구내식당 운영권 등 기업들끼리 인수인계
밀어붙이기식 동반성장 ‘중소업체 보호’ 빛잃어


삼성그룹 계열사인 호텔신라는 지난달 27일 자사의 고급 베이커리 카페 ‘아티제’를 운영하는 자회사 보나비를 대한제분에 매각한다고 공시했다.

올해 1월 말 이명박 대통령이 “대기업그룹 2, 3세들이 소상공인들의 생업과 관련한 업종까지 사업영역을 넓히는 것은 자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한 지 3개월여 만에 연매출액 7500억 원이 넘는 또 다른 대기업에 회사를 넘긴 것이다.

[채널A 영상] ‘재벌빵집’ 나간 자리에 또 다른 대기업…골목상권 한숨만

호텔신라 측은 “주주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230여 명에 이르는 인력을 승계할 수 있는 기업을 찾다 보니 선택의 폭이 좁았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해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대기업들이 빵집이나 구내식당 운영 사업에서 잇달아 철수하기로 했지만 결국 또 다른 대기업으로의 ‘손 바뀜’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외손녀인 장선윤 블리스 대표 역시 그가 운영하던 고급 빵집 ‘포숑’을 한 국내 중견그룹에 넘길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2월 “동반성장을 위한 정부 정책에 적극 부응하기 위해 포숑에서 손을 떼겠다”고 밝힌 당초 의도와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지난달 27일 한국전력 구내식당 운영권 입찰에서도 대기업인 동원그룹 계열사 동원홈푸드가 운영권을 따냈다. 정부가 최근 자산규모 5조 원 이상인 상호출자제한집단 소속 대기업에 공공기관의 구내식당 운영을 맡기지 않기로 해 중소 업체들이 대거 참여했지만 결국 자산이 1조3068억 원에 이르는 동원산업의 자회사인 동원홈푸드가 운영권을 가져갔다.

한 중소 단체급식 업체 관계자는 “입찰에 참여한 15개 업체 가운데 10곳이 중소기업이었지만 대기업 들러리만 선 꼴”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재계 관계자들은 정부가 기업 생태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동반성장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호랑이 없는 골에 여우가 왕 노릇’을 하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국내 대기업 계열사 시스템통합(SI) 업체들이 공공입찰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한 ‘소프트웨어 진흥법’이 2일 국회를 통과했지만 이 역시 당초 정부의 의도와 달리 외국기업만 혜택을 볼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법이 오라클, 시스코 같은 글로벌 기업에는 적용되지 않아 결국 외국계 기업들이 공공시장을 독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김세종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기업들이 무조건 중소기업 영역에서 발을 뺄 게 아니라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하거나 자영업자들의 우수한 제품을 제값에 구매해 유통 비즈니스를 하는 ‘플랫폼 방식’의 사업모델을 고민해 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기업#대기업#동반성장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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