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복기해 보는 환율주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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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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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94년 만에 문을 닫아야 했던 미국의 한 대형 금융회사에서 7년 전 미국 연수 시절 인턴으로 3개월 동안 근무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이곳은 선진 금융회사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개인퇴직연금계좌(IRA·Individual Retirement Account)의 고객별 투자운용보고서 수백 장을 넘겨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부분 계좌의 원금이 무리한 투자로 반 토막 이상 사라지고 없었다. 더 놀라웠던 것은 이 회사 직원들이 문제를 대하는 태도였다. 대화를 나눠 본 직원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었지만 한결같이 괜찮아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에 빠져 있는 듯했다. 이 회사 직원들이 집단최면에서 벗어나 뭔가 바꾸려다 실패하고 결국 짐을 싸야 했던 시간은 채 5년이 걸리지 않았다.

최근 한국 경제에 부담을 줄 수 있는 리스크로 경고가 잦아진 것이 외국자본의 급격한 이동에 따른 후유증이다. 지난달만 해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과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 한국금융연구원이 각기 다른 보고서를 통해 비슷한 주장을 폈다. 허경욱 기획재정부 1차관은 지난달 17일 한 행사에서 “해외 단기자본의 유출입 문제를 컨트롤하는 것은 소규모 개방경제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이런 주장을 뒷받침했다.

최근 이 같은 지적들이 잇따르는 것은 올 들어 외국인 자본 유입이 급증하고 있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올해 1분기 외국인 투자가들이 주식시장에서 순수하게 사들인 금액이 6조1433억 원으로 2004년 1분기 이후 가장 많았고 국내 외국계은행 지점의 단기차입금이 지난해 2분기부터 급격한 증가세로 돌아섰다. 혹시라도 이 자금들이 갑자기 빠져나갈 때 겪을 수 있는 고통은 이미 1998년 외환위기 때 넘칠 정도로 체험했다.

금융위기로 신(新)자유주의 바람이 잦아들고 해외자본 규제에 대한 목소리가 커진 틈을 타 브라질 대만 등 여러 국가들이 잇따라 규제책을 내놓고 있다. 한국의 정책당국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으면서도 여전히 엉거주춤한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08년 과감한 외환시장 개입으로 이름을 떨쳤던 최중경 전 재정부 1차관(주필리핀 대사)이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으로 복귀한다. 그가 당시 내세운 ‘환율 주권론’에 지금도 강한 거부감을 갖는 이들이 적지 않다.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해 인위적으로 원-달러 환율을 끌어올리는 것(원화가치 절하)은 시장 왜곡 등의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최 내정자가 즐겨 사용한 “해외 투기자본에 일국(一國)의 환율을 맡겨둘 수는 없다”는 말은 이 시점에 복기할 대목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시장 개입으로 외환시장을 관리하는 것은 2008년과 같은 대내외 반발을 살 수 있는 하수에 속한다. 미리 해외자본이 ‘꼬리로 몸통을 흔들지 않도록’ 예방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상수다. 시장에서는 최 내정자가 국내에 복귀하는 다음 달 중 소관 부처와 협의를 거쳐 ‘해외자본 유출입 안정 방안’의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예상하는 이가 많다.

문제를 인식하는 것과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해묵은 과제를 실행함으로써 환율 주권론의 밝은 면도 조명했으면 한다. 알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 개인과 기업은 짐을 싸는 것에 그칠 수 있지만 국가로서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

박현진 경제부 차장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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