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한국경제를 답하다

  • 입력 2009년 3월 23일 02시 56분


정부, 글로벌IB 10개社 상대 전화회의… ‘위기취약論’ 등 반박

“HSBC 홍콩의 프레드 뉴먼입니다….” 20일 오전 10시 50분 서울 여의도 금융위원회 회의실. 인사말이 스피커폰에서 흘러나오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국 정부가 글로벌 투자은행(IB)을 상대로 처음으로 개최한 콘퍼런스 콜(전화회의)에 ‘문제의 HSBC’가 참석한 것이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신흥국 중 한국이 세 번째로 외환위기에 취약하다’고 보도하면서 자료 출처로 밝힌 곳이 영국계 은행 HSBC다.

이정호 금융위원회 외신팀장이 예상 질문지를 뒤적였다. HSBC는 미리 질문지를 보내지 않았다. 무슨 말이 나올지 몰랐다. 콘퍼런스 콜 주관자인 이창용 금융위 부위원장의 답은 짤막했다. “키프 고잉(Keep going·계속 말씀하시죠).”

지난해 9월 글로벌 금융위기가 전 세계 금융시장을 덮친 뒤 일부 글로벌 IB와 외신이 한국 경제에 대한 부정적인 분석을 쏟아냈지만 정부로서는 그때마다 해명성 반박이나 할 뿐 근본적인 대처 방법을 찾지 못했다.

20일의 콘퍼런스 콜은 한국 경제와 글로벌 IB 사이에 놓인 오해를 풀기 위한 첫 번째 시도였다.

서울과 홍콩에서 활동하는 씨티그룹, 크레디리요네증권(CLSA), 크레디트스위스, 골드만삭스, HSBC, JP모간, 메릴린치, 모건스탠리, 스탠더드차터드, UBS 등 주요 IB의 이코노미스트들이 참여했다.

회의가 시작되자 이 팀장은 “바로 질문으로 들어가자”고 했고 이코노미스트들도 기다렸다는 듯 민감한 질문을 쏟아냈다.

“중소기업 대출, 이미 많습니다. 대출을 더 늘리면 도덕적 해이 문제가 불거지지 않나요?”(CLSA 숀 코크란 리서치센터장)

이 부위원장은 “미묘한 질문”이라며 “정책적 딜레마가 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당국은 중소기업 대출을 늘리려는 게 아니라 대출 감소 속도를 줄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HSBC의 뉴먼 리서치센터장은 “가계대출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미국 금융위기를 촉발한 것처럼 한국도 가계부문이 위기의 시발점이 되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질문이다.

이 부위원장은 “연체율이 1%도 안 된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20%가 넘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스피커폰 저편에선 숨소리만 들렸다.



▼정부 - 글로벌IB 첫 전화회의 ‘치열했던 1시간’▼

글로벌 IB “가계대출 너무 많지않나… 中企대출 포함됐나”

금융위 “가계 연체율 정확히 0.89% 불과”

Q: 조선 수주 취소사태땐 외환 악영향 없나?

A: 취소 5%도 안될것… 업체 큰타격 없어

Q: 외화차입 중 유럽계 비중 60%라던데…

A: 35%뿐… ‘유럽계’ 용어 정의따라 달라

한국 경제를 불안하게 보는 글로벌 투자은행(IB)은 영국계인 HSBC만이 아니었다.

20일 금융위원회의 콘퍼런스 콜(전화회의)에 참석한 이코노미스트들은 한국 경제의 취약점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면서 정부의 설명을 요구했다. 금융위는 이런 지적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보다는 구체적인 통계수치를 제시하면서 시각차를 줄이는 데 주력했다. 이날 회의는 통역 없이 영어로만 진행됐으며 이코노미스트들의 질문에는 이창용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직접 답변했다.

○ 예리한 질문에 긴장감 고조

글로벌 IB의 이코노미스트들은 보름 전부터 금융위에 자신들이 궁금해하는 질문을 보냈다. 대외 채무의 성격, 조선사들의 선물환계약 만기 구조 등 기본적인 데이터와 관련된 항목이 많았다. 이런 질문만 나온다면 회의가 무난하게 끝날 것 같았다.

그런데 회의를 열고 보니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작심한 듯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다.

스탠더드차터드의 아시아리서치본부를 책임지는 데이비드 만 센터장의 질문도 그랬다. 그가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외채 규모가 얼마냐”고 운을 뗄 때만 해도 금융위 관계자들은 ‘그런 질문쯤이야’ 하는 표정이었다.

이 부위원장은 “만기가 1년이 안 남은 유동외채가 1940억 달러이고 이 중 국내 은행과 외국계 은행 국내 지점이 갖고 있는 것은 1200억 달러”라며 “최근 외채 만기 연장비율이 100%”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정호 외신팀장은 “외채 문제에 대한 일부 외신 보도가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만 센터장은 기다렸다는 듯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조선사들이 수주해놓은 물량이 대거 취소되는 일이 일어나면 외환시장은 어떤 영향을 받나.”

외국 발주처가 한국 조선사에 맡긴 물량을 취소하면 국내로 들어오기로 돼 있는 달러가 들어오지 않아 원-달러 환율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선물시장에서 달러를 팔아놓은 조선사들은 비싼 값에 달러를 다시 사들여야 하는 처지가 될 수 있다. 곤란한 질문이었다.

이 부위원장은 “수주 물량이 취소될 것으로 추정되는 비율은 5% 미만이고 여기에는 가격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려고 발주처가 ‘협박’하는 경우도 포함돼 있다. 대형 조선사가 수주 취소로 큰 타격을 입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한국의 은행은 탄탄한가’ 의문 제기

‘기업 구조조정을 담당하는 한국의 은행들은 과연 건전한가.’ 많은 이코노미스트가 이런 의문을 갖고 있음이 이번 회의에서도 확인됐다.

골드만삭스 서울지점의 필리파 로저스 애널리스트는 “한국의 경우 은행뿐 아니라 금융지주회사도 감독 대상에 포함해야 하고 현행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뿐 아니라 새로운 건전성 기준인 ‘유형자기자본비율(TCE)’도 강조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고 말했다. UBS 아시아리서치본부의 레이 흥 애널리스트는 한 술 더 떠 “금융위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은행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스트레스 테스트’를 한 적이 있는가. 있다면 결과를 공개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런 질문에 답하는 건 사실 어렵지 않다. ‘개별 은행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료라 공개할 수 없다’고 하면 그뿐이다. 이 팀장이 그 정도로 답하고 넘어가려 하자 이 부위원장이 끼어들었다.

그는 “은행 건전성 평가와 관련해 ‘불공정하다(unfair)’는 생각도 든다. 국제기준이 너무 빠르게 변한다”고 말했다. 국제기준을 따를 수밖에 없는 한국으로선 자본건전성에 문제가 없는데도 기준이 변경될 때마다 평가를 새로 하느라 애로가 있다는 고충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국 정부가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을 묻는 이코노미스트도 있었다. 크레디리요네증권(CLSA)의 숀 코크란 리서치센터장은 “한국이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이 미국식인가, 독일식인가”라고 물었다. 미국처럼 금융회사에 공적자금을 집어넣는 방식과 독일처럼 장기적 관점에서 개별 회사에 대한 지원을 제한하는 방식 중 어떤 쪽을 선호하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이 부위원장은 어느 쪽도 고르지 않았다. “한국 금융회사는 미국이나 유럽 같은 구조적인 문제가 없다. 선제적 대응을 하면 된다. 은행 자본확충펀드, 배드뱅크, 관련법 개정작업 같은 것들이다.” 평이하지만 현실을 잘 반영한 대답이었다.

○ ‘소통 없다면 오해는 필연’

이날 전화회의는 똑같은 경제 현상에 제각기 다른 기준을 적용해 생기는 오해를 소통을 통해 풀자는 취지에서 열린 것이다. 회의 도중에도 소통의 필요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장면이 연출됐다.

박찬익 모건스탠리 리서치센터장: 국내 시중은행의 외화 차입 규모 가운데 유럽계 은행에서 빌려온 자금의 비중이 얼마나 되나.

이 부위원장: 전체 외화 차입액 중 35%가 유럽에서 들어온 것이다.

박 센터장: 난 더 높다고 생각했는데…. 알겠다.

이 부위원장: 잠깐, 왜 더 높다고 보는 건가.

박 센터장: 난 유럽계 비중이 60% 정도 된다고 듣고 있다.

이 부위원장: 유럽계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금융상품을 어떻게 분류하는지에 따라 숫자는 달라질 수 있다. 숫자를 다시 확인해 알려주겠다.

동유럽 국가의 부도위기설이 번지는 상황이어서 유럽계 은행에서 빌려온 외채 비중은 대단히 중요한 수치다. 만약 글로벌 IB들이 이 수치를 60%라고 믿고 외신이 이를 인용해 보도한다면 한국은 또다시 위기설에 휘말릴 수 있다.

모건스탠리가 파악한 60%에는 유럽계 은행의 한국지점이 본사에서 차입한 것도 포함됐을 것으로 일부 전문가는 보고 있다. 국내 금융회사나 정부가 갚을 필요가 없는 금액이 들어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제시한 수치가 진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HSBC 프레드 뉴먼 센터장의 질문은 회의가 끝날 무렵 나왔다. 가계대출의 연체율이 높지 않다는 정부 측 설명에 뉴먼 센터장은 “중소기업이나 자영업 대출이 가계대출 통계에 포함돼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요구했다.

“전혀 포함돼 있지 않다. 전체 가계대출 연체율은 2월 말 기준 0.89%, 가계대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은 0.7%에 불과하다. 가계대출의 담보인정비율(LTV)도 47%로 낮은 편인데 이런 숫자는 모두 정확하다. 중소기업 대출연체율도 높지 않다.”

이 부위원장은 숨도 쉬지 않고 수치를 들어가며 거침없이 답변했다.

이 팀장은 뉴먼 센터장에게 “답변에 만족하느냐”고 물었다. “충분히 이해했다. 만족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1시간 내내 콘퍼런스 콜을 위한 삼각형 전화기 앞에서 긴장하고 있던 금융위 직원들이 ‘휴’ 하고 작은 숨을 내쉬었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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