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中企 “대 잇다간 망할 판”

  • 입력 2008년 6월 17일 20시 03분


의약품 및 의료장비 제조업체인 한국백신의 하창화(68) 회장은 지난해 외아들(30)에게 가업(家業)을 물려주려고 절차를 알아보다 충격을 받았다. 물려줄 회사의 가치는 400억~500억 원. 증여 후 세금으로 200억 원을 내고 나면 회사 문을 닫아야 했다.

세무사는 "3년 동안 수익의 90%를 배당하고 본인이 받을 퇴직금을 두 배로 올리면 기업가치가 떨어질 테니 그 후 증여 하라"고 권했다. 하 회장은 며칠 밤을 새며 고민하다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그는 "40년 넘게 배당 한 번 안 하고 수익을 대부분 시설에 투자하며 일군 기업인데 기업 가치를 일부러 떨어뜨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법인세로 38억 원을 냈다"며 "매년 수십억 원을 세금으로 내고 종업원 270명의 고용을 유지하는 회사가 세금 때문에 문을 닫아야 한다면 국가적으로도 손해 아니냐"고 되물었다.

중소기업 경영자 4명 중 3명이 가업승계 과정에서 상속 증여세를 내고 나면 경영에 위기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기업은행 산하 기은경제연구소가 거래기업 중 설립된 지 20년 이상, 최고경영자(CEO)가 55세 이상인 기업 216곳을 조사한 결과다.

●응답 기업 17.6%, "세금 내면 망할 것"

경기 화성시에서 연매출 250억 원 규모의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정모(64) 사장은 가업상속공제와 기본공제를 받아도 약 78억 원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

정 사장은 "회사가 매년 5억~10억 원의 순이익을 내는데 수십 억 원의 세금을 어떻게 내겠냐"며 "나눠서 내는 동안 중국 업체와 기술격차를 유지하기 위해 적절한 투자를 못 하면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에 응한 기업 중 17.6%는 "상속 증여세를 내고 나면 경영이 전혀 불가능해 폐업하거나 도산해야할 것"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손톱깎이 세계시장 점유율 1위인 쓰리쎄븐은 1월 창업주 김형규 회장이 세상을 떠난 후 유족들이 회사를 매각했다. 업계에서는 수십억 원에 이르는 상속세를 감당하지 못해 유족들이 회사를 판 것으로 보고 있다.

●세금 피하려 편법 동원하기도

중소기업은 현금이 부족하고 주식도 상장되지 않아 현금화가 힘든 탓에 공장이나 회사를 팔아야 세금을 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세금을 피하려 편법을 동원하는 기업도 있다. 자녀 명의로 새 법인을 세운 뒤 거래처를 옮기고 기존 회사를 폐업하는 '모자 바꿔쓰기'가 대표적인 편법 사례다. 배당을 과도하게 해서 고의로 주가를 떨어뜨린 뒤 주식을 증여하기도 한다.

조봉현 기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법대로 세금을 내고 살아남을 기업이 거의 없다보니 편법으로 상속을 하고 이 과정에서 기업의 경쟁력이 저하된다"며 "일본처럼 100년을 잇는 장수(長壽) 기업이 나오기 힘든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창업 1세대 중 상당수가 은퇴를 앞두고 있어 상속세를 피하기 위한 편법 때문에 기업가치가 망가져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중소기업 중앙회가 지난해 △기업역사가 30년 이상 된 중소기업과 △역사가 20년 이상이면서 최고경영자(CEO) 연령이 55세 이상인 중소기업 1879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7.1%가 '가업 승계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또 응답 기업 중 55.4%가 '현재 계획을 세우고 있거나 승계 과정을 진행 중'이라고 응답했다.

●한국 상속세율 최고 수준

자유기업원이 123개국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 50%는 미국, 일본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상속세가 있는 52개국의 평균세율은 21%였다.

중소기업 연구원에 따르면 동일한 기업이 한국, 독일, 프랑스에서 상속을 했을 때 내야하는 상속세액은 한국이 독일의 4배, 프랑스의 6배였다

상속세가 높은 국가도 중소기업의 가업승계에 대해서는 각종 혜택을 주고 있다. 감당하지 못할 세금을 매겨 기업을 고사시키는 것보다 기업이 일자리를 창출하고, 세금을 내도록 하는 편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 강국(强國)인 독일은 상속받은 기업을 10년 동안 성공적으로 운영하면 85%까지 세금을 깎아주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프랑스는 사업용 자산을 상속했을 때 75%를 공제하고 나머지 25%에 대해서만 세금을 매긴다.

신상철 중소기업 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상속 증여세 수입 비율은 한국이 0.22%인 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0.128%"라며 "다른 국가처럼 사업용 자산에 대해서는 각종 세제 혜택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지난해 말 가업상속에 대한 공제한도를 1억 원에서 상속 재산의 20%(최대 30억 원)로 늘렸다. 하지만 이번 조사에서 정부의 개정안에 만족한다는 중소기업은 7.5%에 불과했다.

중소기업 중앙회, 중소기업연구원, 기은경제연구소는 지난 달 청와대에 상속 증여세율을 현행 '10억~30억 원 이하 40%, 30억 원 초과 50%'에서 '10억~50억 원 이하 40%, 50억 원 이상 45%'로 낮춰달라고 건의했다.

정부는 최근 유가환급금 등 민생대책으로 이미 10조 원 이상을 지출해 상속세를 대폭 깎아주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장원재기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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