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안하고 이래라저래라…‘빨간펜 상사’ 가장 싫어요”

  • 입력 2006년 10월 26일 03시 00분


“정말 사표라도 내고 싶었어요. 자기는 빈둥빈둥 놀면서 저한테 모든 일을 다 시키는 거예요. 게다가 제가 보고서를 만들어 놓으니까 생색은 자기가 내더군요.”

한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29·여) 대리는 얼마 전 끝난 프로젝트 생각만 하면 아직도 분통이 터진다. 업무 책임자인 과장은 모든 일을 부하 직원들에게 시켜 놓고 자신은 빈둥거리기만 했다. 업무 시간에 그가 한 일의 70%는 인터넷 서핑.

“과장이 퇴근 무렵 빨간색 펜을 들고 나타날 때는 정말 화가 났어요. 혼자 놀다 나타나서 업무 결과를 빨간색으로 수정만 해주고 ‘내일 보자’며 유유히 퇴근하는 거죠. 그럼 부하 직원들은 할 수 없이 야근을 했어요. 남은 사람들 기분이 어땠겠어요?”

요즘 각 기업에서는 부하들에게 지시와 코멘트만 하고 본인은 일하지 않는 ‘빨간펜 상사’에 대한 젊은 직원들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 이 문제는 상명하복의 기업 문화로 인해 이슈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조직문화가 바뀌고 신세대 직원들이 많아지면서 점차 직장 안의 갈등 요소로 불거지고 있다.

불성실한 상사에 대한 불만은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한 삼성그룹의 지식포털 ‘영삼성닷컴’(www.youngsamsung.com) 설문조사에서 잘 나타난다. 올해 4월 젊은 직장인 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 ‘업무를 떠맡기고 자신은 노는 상사’(28%)가 직장인을 힘들게 하는 상사 1위에 꼽혔다.

LG그룹의 사내(社內) 포털 ‘LGIN’이 지난해 ‘꼴불견 상사’를 주제로 실시한 의견 달기 이벤트에서도 “턱 끝으로 지시만 하고 정작 자기는 노는 상사가 너무 보기 싫다” 등의 의견이 수십 건 올라와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상사의 대부분은 자신은 ‘관리와 지시’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 대기업 부장은 “업무에 대한 관리감독이 회사 간부의 업무가 아니냐?”고 되묻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SK텔레콤의 구경모 인사담당 매니저는 “리더의 역할에는 관리와 지시뿐만 아니라 업무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부하 직원들을 끌고 나가는 것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최근에는 거듭된 구조조정으로 과장과 차장, 심지어 부장까지 실무자 역할을 해야 한다”며 “중간 관리자가 관리만 하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 회사는 ‘일하는 조직’을 만들기 위해 최근 직위 체계를 없애고 전체 조직을 팀장과 팀원으로 단순화했다.

‘지시만 하는 상사’들을 방치할 경우 조직이 부닥치는 부작용은 만만찮다. 특히 이런 상사들일수록 부하 직원들의 일할 의욕을 빼앗아간다는 점이 문제다.

LG경제연구원의 김현기 책임연구원은 “부하 직원들이 ‘나만 고생한다’는 피해의식을 갖게 되면 대충 일하고 보자는 분위기가 생긴다”며 “이럴 경우 장기적으로 조직의 성과가 떨어지고 이직(移職)도 많아진다”고 말했다.

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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