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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6월 9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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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의 ‘바나나 맛 우유’와 ‘딸기 맛 우유’. 같은 회사 제품이지만 이들이 받는 ‘대접’은 격이 다르다.
예를 들면 이렇다. 할인점들은 딸기 맛 우유 4개를 사면 1개를 덤으로 주는 행사를 자주 연다. 하지만 바나나 맛 우유는 많이 사더라도 덤을 주지 않는다.
대형 할인점들이 빙그레의 최고 브랜드인 바나나 맛 우유를 ‘덤 행사’에 끼워 팔려고 하자 빙그레는 바나나 맛 우유를 지키기 위해 고육책으로 딸기 맛 우유를 만들었다.
제조업체에 대한 유통업체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다.
유통업체는 제조업체의 납품가를 사실상 혼자서 결정한다. 제품규격도 유통업체가 원하는 가격대에 맞춰 만들어야 한다. 심지어 제품 개발마저 유통업체의 뜻에 따라야 하는 등 막강한 바잉 파워(Buying Power·구매력) 앞에서 제조업체들은 갈수록 초라해지고 있다.
○ 가격과 규격은 유통업체 뜻대로
제조업체의 영업담당 직원들은 할인점의 초특가 행사용 전단지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예컨대 소매가격이 3000원짜리인 제품을 제조업체와 사전 상의 없이 2700원으로 깎아 전단지를 뿌리는 경우가 많다. 가격 인하분은 제조업체가 고스란히 떠안는다.
샴푸, 세제, 비누 등을 생산하는 생활용품 업체들은 아예 할인점이 정한 가격대에 맞춰 제품규격을 정한다.
대기업인 LG생활건강은 최근 1만 개가 넘는 상품 수를 줄이기 위해 대대적인 품목 정비에 나섰다. 똑같은 제품인데도 유통업체별로 용량을 다르게 만들어 납품하다 보니 제품 종류가 많아진 것.
유통업체의 힘은 자사브랜드(PB) 상품 매출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3대 할인점의 PB 매출액은 2002년 4500억 원에서 매년 2배 안팎으로 성장해 지난해엔 1조4540억 원에 이르렀다. 올해 예상 매출은 2조1500억 원.
백화점도 의류 제조업체를 계열회사처럼 활용해 백화점 브랜드 제품의 생산을 맡긴다.
현대백화점 김인호(金仁鎬) 유통연구소장은 “중국 등 해외에서 직접 물건을 들여오는 글로벌 소싱이 늘어나는 것도 유통업체의 힘을 키우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 믿을 구석은 ‘브랜드 파워’뿐
금강제화는 지난해 6월 롯데백화점 11군데 점포에서 ‘레노마’ 브랜드 매장을 철수시켰다. 롯데 측이 수수료 인상을 요구하자 아예 매장 철수를 감행한 것. 금강제화 측은 “그나마 브랜드 파워와 직영점이 있기 때문에 유통업체에 대항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풀무원은 프랑스계 할인점 까르푸가 원가 인상분을 2년 동안이나 납품가에 반영해 주지 않자 2003년 12월 까르푸 납품을 중단했다.
삼성전자도 최근 가전제품 납품가격을 두고 까르푸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느긋하다. 까르푸를 찾은 소비자가 삼성전자 가전제품이 매장에 없으면 다른 할인점이나 대리점으로 갈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만큼 브랜드 파워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유통업체에 맞서 제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제조업체는 많지 않다. 오히려 줄어드는 추세다. 납품가 인하가 품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뻔히 알기 때문에 유통업체의 납품가 인하 요구에 쩔쩔맨다.
한신대 경영학과 오창호(吳昌昊) 교수는 “유통업체에 맞설 수 있는 힘은 브랜드뿐”이라며 “브랜드 파워를 가진 부문별 1, 2위 업체를 뺀 대부분의 제조업체들은 유통업체의 PB 상품을 만드는 하청업체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 상생(相生)의 길을 찾아라
유통업체와 제조업체 간 힘의 역전 현상은 더욱 고착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유통전문가들은 내다본다.
하지만 유통업체가 일방적으로 제조업체를 몰아붙이는 것은 유통업체에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유통업체와 제조업체가 함께 새로운 고객을 찾아야 한다는 것.
제조업체와 유통업체가 공동으로 판매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해 상품 부족을 사전에 없애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 홈플러스는 제품 발주권을 납품업체가 결정하는 ‘공급자 재고관리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홈플러스 구매시스템 담당 김성철(金成哲) 과장은 “납품업체가 생산 일정에 맞춰 알아서 납품하기 때문에 상품이 모자라는 상황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며 “자연스럽게 매출 증가로 이어져 제조업체와 유통업체 모두에 이익”이라고 말했다.
오 교수는 “제품개발 단계에서부터 제조업체와 유통업체가 서로 믿고 의지하는 상생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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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쓸만한 中企상품 다 모였네…이마트, 업체에 유통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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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대서양홀 ‘이마트 중소기업 우수상품 박람회’장.
신세계 이마트가 국내 중소기업 제품을 발굴하기 위해 개최한 박람회장에는 1315개 업체 중 서류심사와 사전 상담을 통해 선정된 152개 업체가 참가했다. 특히 품질이 좋아도 판로를 확보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 관계자가 많이 눈에 띄었다.
MP3플레이어용 스피커 제조업체인 ‘아침P&C’는 지난해 중소기업청에서 ‘기술혁신상’을 받고 미국 등 해외로도 수출하는 회사지만 국내 판로 확보가 어려워 이 박람회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이 회사 영업담당 윤정노(尹貞老) 실장은 “중간유통상을 통할 경우 마진이 너무 적다. 수출하는 것보다 국내 판로 개척이 더 어렵다”고 털어놨다.
아톰, 레오 등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로 이번 박람회에 참여한 ‘지앤지엔터테인먼트’의 김송우(金松佑) 의류사업 본부장은 “과거시험을 보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김 본부장은 “동대문 도매시장에서는 아동용 티셔츠를 팔기 힘들다”며 “할인점 유통망을 뚫을 기회가 주어져 기쁘다”고 덧붙였다.
이마트의 바이어들도 객관적인 기준으로 좋은 상품을 발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박람회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왜 그동안 이마트와 거래가 없었을까’ 할 정도로 좋은 제품이 많았다는 것.
조리주방용품 담당 이상훈(李相勳) 바이어는 “바이어의 상품 선정 기준에 불만을 제기한 제조업체가 적지 않다”며 “이번 박람회는 외부 전문가와 소비자 평가단이 공동 심사하기 때문에 객관성과 공정성을 기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이경상(李敬相) 이마트 대표는 “국내 제조업체들과 함께 성장하는 상생의 기회를 마련하자는 취지에서 이 행사를 기획했다”며 “앞으로 연간 2회 정례화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마트는 이번에 선정된 우수 업체에 한해 2개월 시범 판매를 거쳐 올해 9월 정식 입점시킬 계획이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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