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니벌라이제이션’…첨단업종 ‘자기잠식 효과’ 고민

  • 입력 2005년 3월 22일 17시 36분


《“한참 기다리더라도 ‘슬림 브라운관 TV’로 살래요.” 4월 초 결혼 예정인 회사원 정모(31) 씨는 예비신부와 함께 가구와 전자제품을 대부분 장만했지만 유독 TV만은 아직 구입하지 않았다. 가전제품을 한꺼번에 구입한 A전자업체 대리점에 인기가 높은 슬림 브라운관 TV가 없었기 때문. 대리점 직원은 같은 크기의 평면 브라운관 TV나 가격이 100만 원 이상 비싼 액정표시장치(LCD) TV를 권했지만 정 씨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이처럼 기능이나 디자인이 탁월한 후속제품이 나오면서 해당 기업이 먼저 내놓은 비슷한 제품의 시장을 깎아먹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마케팅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자기잠식 효과’ 또는 ‘카니벌라이제이션(cannibalization)’이라고 부른다.》

▽자사 제품간 경쟁에 업체들 고심=2월 초 경쟁적으로 ‘세계 최초’를 강조하며 슬림 브라운관 TV 판매를 시작한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정 씨 같은 고객이 늘자 당황하고 있다.

같은 크기의 기존 평면 브라운관 TV 매출이 30% 이상 줄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조 원대의 막대한 투자를 한 LCD TV 시장이 확대되는 속도를 늦출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3월 말 첫선을 보인 뒤 다음 달인 4월에 6332대가 팔렸던 현대자동차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투싼’도 비슷한 사례.

지난해 8월 같은 그룹 계열사인 기아자동차의 ‘스포티지’가 나오자 투싼의 국내 판매는 주춤했다.

현재 월 판매대수는 3000대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 반면 투싼과 같은 차대와 엔진을 사용하면서 디자인, 엔진 미세조정, 내장재 등을 달리한 스포티지는 지난해 9월 6608대가 팔렸으며 지금까지도 매달 5000대 넘게 팔리고 있다.

5월 1일 시작되는 위성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과 올해 안에 시작될 지상파 DMB방송도 ‘자기잠식 효과’를 보일 가능성이 있어 이동통신사업자들이 고민하고 있다. 이용료가 싼 DMB방송이 시작되면 SK텔레콤의 ‘준’이나 KTF ‘핌’ 등 이동통신업계의 기존 서비스 이용이 대폭 줄어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제품기획 단계부터 철저한 차별화 필요=전문가들은 최근 몇 년 사이 한국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이런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다양한 소비자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품종 생산이 불가피하며 앞서 팔리던 제품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제품을 빠른 속도로 내놓지 않으면 글로벌 경쟁에서 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연수(李娟洙)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외부와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기업 내부 경쟁도 동시에 강화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이라며 “하지만 자사 제품간의 경쟁이 지나치게 치열해지면 제품 개발비를 회수하지 못하거나 재고 부담이 늘어 기업의 수익성을 훼손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제품개발 과정부터 치밀한 준비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동훈(李東勳)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한국 기업들은 이런 현상에 대한 고민이 아직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며 “제품개발 초기단계부터 ‘밀어야 할 제품’ ‘미끼로 쓸 제품’ 등 명확한 전략을 세워 제품 간 충돌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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