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현장에선 지금…]<1>따로 노는 수출과 내수

  • 입력 2004년 4월 19일 17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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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후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 있는 디지털TV 공장. 연건평 1만평의 2층 건물에 빽빽이 들어선 7개의 디지털TV 조립 생산라인에는 컨베이어별로 60∼70명의 근로자가 좌우로 늘어서 각종 부품을 촘촘히 끼우느라 손놀림이 바빴다.

미국시장으로 나가는 50인치 DLP 프로젝션TV 신모델 ‘아틀란티스’가 컨베이어를 타고 앞에 나타나자 한 직원이 화면 색상과 초점의 정상 여부를 점검하느라 눈동자를 쉴 틈 없이 움직였다.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임현재 과장은 “미국 등으로부터 밀려드는 주문량을 소화하려면 라인을 풀가동해도 부족해 3월 초부터 하루 8시간의 정상조업 외에 잔업을 2시간 확대하고 매월 첫째, 셋째 주 쉬던 토요일에도 직원들이 특근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13일 오후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주변 상가의 한산한 모습. 삼성전자는 수출 호조 등으로 생산라인을 풀가동하고 있지만 인근 지역의 내수경기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다. 상가 뒤편으로 수원사업장에 있는 지상 25층 높이의 정보통신연구소가 보인다. 수원=강병기기자

전략마케팅팀 송명숙 과장은 “1년 전보다 주문량이 60% 이상 증가했다”면서 “수주 상황 등을 체크하느라 토요일과 일요일도 거의 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TV는 해외 브랜드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주문이 크게 늘었다. 회사는 수출품을 처리하기 위해 컨테이너(40피트짜리 기준) 40여대를 추가로 투입했다.

▽경기 양극화의 현장=수출은 지난해 19.3% 증가했다. 또 올 2월 한 달간 전년 동월 대비 45% 늘어나 1988년 8월 이후 최고의 증가율을 기록할 정도로 수출이 잘된다.

그러나 지난해 민간소비와 설비투자는 각각 1.4%와 1.5% 감소하는 등 수출과 내수의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면서 수출비중이 국내총생산(GDP)의 60%에 육박했다. 1990년대는 수출비중이 평균 34%였다.

실제로 삼성전자 수원공장 생산현장의 즐거운 비명과 달리 주변의 상가는 매출이 격감하고 가게를 내놓는 상인이 속출하는 등 경기 양극화의 단면이 여실히 드러났다.

수원공장에서 택시로 5분 거리인 영통지역 상가 밀레니엄플라자에서 옷가게를 하는 서유리씨(30)는 “수출이 잘된다고 하지만 매상은 오히려 작년의 3분의 2로 줄었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근처 K주점에서 일하는 강영자씨(50)는 “삼성전자의 생산라인이 다른 곳으로 옮아가고 직원이 줄면서 삼성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면서 “주인이 가게를 내놓았지만 찾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했다.

매탄 4지구 상가는 수원공장에서 도보로 10분이면 닿는 인접 지역이지만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음식점을 하는 김정환씨(44)는 “장사가 안 돼 상당수가 가게를 내놓은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요즘 상인들은 ‘밥 먹고 살면 성공한 것’이라고 말할 정도”라고 전했다.

▽생산은 늘지만 고용창출은 미흡=한때 ‘삼성 월급날은 수원 장날’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그러나 수출과 생산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생산 공정의 자동화와 백색가전 부문의 이전 등으로 고용창출 효과가 미약해지면서 지역 상권에 대한 영향력도 줄고 있다.

삼성전자 수원공장의 고용 인력은 3월 말 현재 2만1100명. 외환위기 이전인 1996년의 1만9000명과 비교하면 8년 사이 2100명 증가했다.

13일 오후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휴대전화를 만드는 LG전자 서울 구로공장은 생산라인을 24시간 풀가동하고 있었다.

350∼400개에 달하는 부품 칩이 1대의 휴대전화 회로기판에 부착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3분. 장착공정의 자동화 덕분이다.

문형철 생산담당부장은 “미국 버라이존 등으로부터 쇄도하는 주문량을 맞추기 위해 생산성 향상과 생산라인 증설, 브라질 등 해외공장의 생산용량 확충 등 수단을 총동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CDMA사업부 김흥석 차장은 “바이어가 요청한 제품의 품질 등을 점검하느라 매일 오후 11시에 퇴근하는 게 보통”이라고 귀띔했다.

LG전자 구로공장의 경우 휴대전화 월 생산량이 250만대로 1년 전에 비해 67% 증가했지만 고용 인력은 2700여명으로 1년 전에 비해 17% 늘었다.

구로공장의 분주한 생산현장과 달리 주변 상가가 썰렁하기는 이곳도 매한가지. 인근 철산시장 근처 음식점에서 일하는 김모씨(39)는 “오늘 두 테이블 손님밖에 없었다. 수출은 잘된다지만 돈이 전혀 흐르지 않고…. 먹고살기가 정말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구로공장 부근에 있는 250평 규모 의류 아웃렛 김두호 매장관리팀 과장은 “외환위기 이후 미래불안 때문에 사람들의 소비성향이 달라졌다”면서 “기업들이 투자할 수 있도록 불안이 해소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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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재기자 wjlee@donga.com

▼전문가 진단 “기업 투자의욕부터 살려야”

경제 전문가들은 경기 양극화를 치유하고 단절된 수출과 내수의 연결고리를 다시 잇기 위해서는 정부가 기업가정신을 되살리고 기업의 투자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丁文建) 전무는 “1, 2월 우리 기업의 해외투자는 78% 증가한 반면 국내 투자는 5% 줄었다”면서 “기업이 국내에 투자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해 기업가정신이 실종되는 일이 없도록 정책혼선을 방지해야 하며 기업을 죄악시하는 사회 분위기도 말끔히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의 투자를 막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시급히 폐지돼야 할 대상으로 제조기업의 부채비율 200% 규제와 출자총액한도 규제 등을 꼽았다.

그는 출자총액한도제 완화 여부와 관련해 “산업자원부와 공정거래위원회가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외환위기 이후 강화된 기업정책은 용도 폐기됐다”고 주장했다.

한국경제연구원 이수희(李壽熙) 기업연구센터소장은 “최근 몇 년 사이 한국기업의 중국행으로 경인지역에서만 일자리 10만개가 줄었다”면서 “산업 공동화(空洞化)가 일자리 공동화와 내수침체로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특히 “이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이 돼 성장과 분배 논란이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그럴 경우 기업가정신은 더욱 위축돼 국내 투자가 지연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는 “우리 경제의 선순환 메커니즘이 돌아가기 위해 지금이야말로 기업이 설비투자에 나설 때이며 이때를 놓치면 나중에 생산시설 부족으로 수출을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까지 직면할 수 있다”면서 국내기업의 역차별을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산업 공동화 현상을 막기 위해 대기업도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는 전자레인지와 볼록브라운관TV, 냉장고 등 백색가전 생산라인의 가동을 대부분 중단한 수원사업장을 연구개발(R&D)의 메카로 탈바꿈시켜 나간다는 계획이다.

2001년 수원사업장 내에 지상 25층 규모의 정보통신연구소를 세워 4700여명의 연구 인력을 이미 확보했다. 내년에는 지상 37층 규모의 디지털미디어연구소를 완공하여 연차적으로 총 7000여명의 연구 인력을 채용해 고부가가치 첨단기술 제품을 개발한다는 계획이다.

이원재기자 w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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