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포석 人事의 세계]기업③- 그룹 재무팀

  • 입력 2003년 7월 27일 18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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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삼성전자의 기업설명팀장인 주우식 상무가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해 미국 홍콩 싱가포르에 있는 해외 투자자 1000여명을 대상으로 해외투자자 설명회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 삼성전자
5월 21일 삼성전자의 기업설명팀장인 주우식 상무가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해 미국 홍콩 싱가포르에 있는 해외 투자자 1000여명을 대상으로 해외투자자 설명회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 삼성전자
“외환위기가 닥치자 계열사에 사람을 자르라고 독려했지만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하는 사장들 때문에 성과가 없었습니다. 부실 숨기기에 급급했지요. 그때 나섰던 것이 그룹 재무팀입니다.”

1998년 외환위기 직후를 떠올리는 어느 삼성그룹 관계자의 얘기.

당시 20여명의 삼성 구조조정본부 재무팀을 이끌던 유석렬(柳錫烈·현 삼성카드 사장) 재무팀장은 이건희(李健熙) 회장의 특별지시를 받고 계열사를 돌며 부실현황을 낱낱이 평가했다. 이들은 높이가 사람 키만큼은 되는 구조조정보고서를 역시 재무통 출신인 이학수(李鶴洙) 구조조정본부장에게 제출하면서 “이렇게 안하면 다 죽는다”고 호소했다.

현재 삼성은 ‘그 작업을 통해 그룹 전체가 재도약할 기틀을 마련했다’고 자체 평가하고 있다. 1999년 6월 대우와 진행하던 ‘삼성차 빅딜’을 깨고 법정관리로 가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한 것도 바로 그룹 재무팀이었다.

▽기업 최고 기밀이 손안에=70, 80년대까지만 해도 ‘경리부’란 이름이 일반적이었고 이들은 ‘오너의 금고지기’였다. 비자금이나 분식회계 등 내밀한 속내를 다루는 자리인 만큼 확실한 충성심이 필요했다.

오너의 심복이나 친인척들이 조직을 장악했고 명문 상업고 출신들이 이들을 뒷받침했다. 과묵하고 꼼꼼하며 숫자에 밝은 인물들이 주로 배치됐으며 은행과의 끈끈한 인맥을 통해 ‘필요할 때 돈을 끌어올 수 있는 능력’이 중시됐다.

A그룹 출신으로 최근 중견기업의 재무담당자로 자리를 옮긴 한모씨(48)는 “대기업들은 재무담당자가 문제를 일으키더라도 기업기밀이 새나가는 것이 두려워 쉽게 바꾸지 못하고 쉬쉬하게 되며 퇴사한 뒤에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80년대 중후반 들어서 기업에 다양한 금융기법이 도입되고 자금조달처도 해외로 확대되면서 경리팀은 ‘금융전문가’로 급격히 ‘업그레이드’됐다. 차변 대변 등의 용어는 한물간 대신 금융공학(工學) 해외기채 포트폴리오 기업어음 환위험관리 등 낯선 어휘가 비기(秘器)처럼 전수됐다. 이들은 새로운 전문지식으로 탄탄히 무장했다.

▽핵심 전략가로=더 큰 변화는 외환위기 이후에 닥쳐왔다. 자금관리 실패, 무모한 투자, 방만한 경영이 기업의 생사를 갈랐던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기업들은 재무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된 것.

컨설팅업체인 대양C&C의 헤드헌팅 부문 박정배(朴廷培) 부사장은 “회사나 공장을 떼서 사고파는 구조조정이 재무팀의 주요업무로 인식됐고 외국 컨설팅업체 등에서 기업구조조정이나 인수합병(M&A) 등에 참여했던 사람, 외국 금융기관에서 투자은행 업무 등을 해본 전문가들이 영입됐다”고 말했다.

기업의 ‘핵심 전략가’로 다시 한번 위상을 바꾼 것. 최고재무책임자란 뜻의 ‘CFO’란 용어가 확산됐으며 주요 그룹의 CFO들은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로 대거 진출했다.

LG경제연구원 이춘근(李春根) 연구위원은 “미국 등 선진국 기업에서도 CFO는 CEO의 파트너로서 2인자”라며 “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에서 사업부가 아무리 밀어붙여도 CFO가 ‘노’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재무 출신 CEO들은 순이익 등 실질적인 이익을 중시하며 경영판단이 치밀해 실수가 없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업무특성상 과감한 투자를 꺼려해 경영이 보수화된다는 단점도 있다”고 덧붙였다.

▽젊은 피가 수혈된다=외환위기 이후에는 해외에서 경영대학원(MBA) 과정을 거친 유학파, 행정고시 출신의 젊은 관료 등 ‘새로운 피’가 대거 영입되고 있다.

삼성전자의 기업설명(IR)팀장으로 세계의 투자자들을 상대로 활동하고 있는 주우식(朱尤湜·44) 상무는 행시 24회로 재정경제부 관료 출신. 99년에 삼성전자 자금담당 이사로 스카우트됐다. LG전자의 재경부문 금융팀장인 박종호(朴鍾昊·39) 상무도 행시 30회로 국세청과 재정경제부 세제실을 거친 관료 출신이다.

SK㈜의 CFO인 유정준(兪柾準·41) 전무는 SK글로벌사태 해결의 진두지휘를 맡고 있다. 미국 일리노이대 회계학 석사 출신으로 맥킨지 한국사무소를 거쳐 98년 고려대 선배인 최태원(崔泰源) 회장의 권유로 SK로 옮겨 40세에 전무로 승진했다.

이처럼 시대와 사람은 바뀌지만 재무통들은 기업경영의 핵심이자 오너나 CEO의 최측근으로 ‘언제나 잘 나간다’는 점에서는 거의 변함이 없다.

4대 그룹의 재무 출신 최고경영자(CEO)
그룹이름직위나이학력
삼성배호원삼성생명 사장53전주고, 고려대 경영학
유석렬삼성카드 사장53경기고, 서울대 경영학, 서울대 산업공학 박사
황영기삼성증권 사장51서울고, 서울대 무역학, 런던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제진훈삼성캐피탈 사장56진주고, 부산대 경영학, 숭실대 대학원 경영학 박사
안복현제일모직 사장54충주고, 경희대 경영학
이재환삼성BP화학 사장55부산고, 서울대 화학공학, 연세대 경영대학원 석사
LG서경석LG투자증권 사장56경남고, 서울대 법학, 재무부 국제심판소 상임심판관
정병철LG CNS 사장57경복고, 연세대 경영학, 서울대 최고산업전략과정
김갑렬LG건설 사장55경복고, 고려대 경영학, 와세다대 비스니스 스쿨
김정만LG산전 사장56부산고, 부산대 경영학, MIT슬로언스쿨 MBA
이종석LG카드 사장51경기고, 서울대 법학, 워싱턴주립대 경영학 박사
SK김창근SK㈜ 사장53용산고, 연세대 경영학, 남가주대 MBA
김우평SK증권 사장51용산고, 고려대 경영학, 동 대학원 석사
현대차이계안현대캐피탈 및 현대카드 회장51경복고, 서울대 경영학
김원갑현대하이스코 사장51부산고, 성균관대 경영학, 홍익대 경영대학원 석사
자료:각 그룹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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