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현대 해법 진통

  • 입력 2000년 5월 28일 19시 50분


자구노력의 내용과 수위를 둘러싸고 금융당국과 현대가 첨예하게 대립해 금융시장에 혼선을 가중시키고 있다. 정부는 현대건설의 유동성위기를 막아주는 대가로 가신그룹경영진의 퇴진과 자산매각 등을 요구했으나 현대측은 마감일인 28일 저녁까지 아무런 답을 보내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재정경제부의 한 관계자는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고 가고 있다”면서 현대측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미적거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이어 “이번 사태의 본질은 현대 계열사 중 1곳인 현대건설의 자금만기 불일치(미스매칭)에 따른 일시적 유동성 부족이지만 현대측이 시장불신의 심각성을 도외시한 채 안이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바람에 사태가 복잡하게 꼬였다”고 현대측의 처신에 불만을 토로했다.

정부와 현대 양측 모두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총론에는 의견이 거의 접근한 상태. 다만 특단의 대책의 내용과 강도, 발표시기 등 각론을 둘러싼 견해차가 워낙 커 합의점을 도출해내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정부와 현대의 난기류〓정부가 현대에 대해 주문한 요구사항의 골자는 △정주영명예회장의 확실한 경영일선 퇴진 △가신그룹 등 주요 경영진의 대폭 물갈이 △주요 계열사 및 자산매각 등 3가지. 앞의 두 항목이 인적 청산을 통한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3번째 요구는 당장 ‘발등의 불’이 된 유동성 문제 해결을 위해 반드시 관철돼야 한다는 게 정부와 채권단의 입장.

특히 인적 청산과 관련된 사항은 현대측이 결심하기에 따라 당장 발표할 수 있고 시장에 미칠 상징적 파급효과도 크다는 점에서 정부측이 강하게 밀어붙였다. 정명예회장과 일부 가신그룹이 퇴장할 경우 이는 ‘현대식의 구태의연한 경영’의 포기 또는 후퇴로 비쳐 시장의 신뢰를 일부나마 되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리다.

채권단은 이와 함께 유동성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소하려면 알짜 계열사와 부동산의 매각방침을 공표하거나 최소한 자금지원의 대가로 채권단에 담보로 제공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외환은행측이 요구한 부동산은 현대의 서산부지 1200만평(시가 평당 5000원)과 인천제철 철강공장. 채권단은 이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하되 상황이 악화되면 매각에 동의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우량 계열사 중 1, 2곳도 시장신뢰 회복 차원에서 매각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주문했다. 정부와 재계 일각에서 현대전자를 다시 LG에 넘겨야 한다는 ‘역빅딜론’이 조심스럽게 제기되는 것도 같은 맥락. 김경림 외환은행장은 “매각 대상을 구체적으로 거론할 수는 없지만 정몽헌회장의 계열사중에는 우량한 회사가 많다”고 말해 이 같은 시각을 뒷받침했다.

▽정부-현대 “파국은 피하자”〓이런 와중에 현대측이 27일 오전 현대증권과 현대투신 주주총회에서 정부의 주 표적인 이익치회장과 이창식사장을 연임시키자 정부는 당혹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한 관계자는 “두 이씨의 경질은 현대측이 시장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며 “정녕 파국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현대측은 초기에는 “단기 유동성 문제만 해결되면 아무 문제가 없다”면서 경영진 개편요구를 일축했지만 사태가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자 뒤늦게 수습방안 마련에 나섰다.

이익치회장의 거취와 관련해 ‘그룹 인사권의 핵심과 관련된 사항’이라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정부측이 긴급경제장관 간담회에서 주력계열사 매각을 요구하자 “정부가 하라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기조로 후퇴했다.

정부도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현대측과의 막후접촉 채널을 활발히 가동하면서 자구계획 실천시한을 28일 밤 9시로 못박는 등 강온양면의 전략을 구사했다. 조원동 재경부 정책조정심의관은 “현대측이 늘 끌려가는 것처럼 비쳐서는 시장을 실망시킬 뿐”이라며 “현대가 이니셔티브를 쥐는 양상으로 국면이 바뀔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자금시장 안정대책 효력 있을까〓당장 관심은 31일 시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냐는 점. 물론 현대측의 대응이 가장 중요한 변수지만 정부가 지난 주말 시중 자금경색을 완화하기 위해 내놓은 대책의 약발이 어느 정도인지도 관심거리다.

정부 대책의 취지는 투신권의 영업기반을 강화해 은행권으로 몰린 자금 중 일부를 투신으로 되돌린다는 것. 투신이 작년 8월 이후 환매자금 마련에 급급해 유동성이 극도로 악화됐고 이것이 채권과 주식의 매수 여력 상실로 이어져 채권 주식시장이 힘을 못쓰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는 것이다.수익금 전액에 대해 비과세 혜택을 주는 새 상품 시판을 허용하는 등 고육책의 흔적이 뚜렷하지만 성패의 관건은 투신에 대한 시장신뢰 회복이라는 게 중론.

업계에서는 회사채 부분보험제도와 신용보증기관의 보증공급 확대 등의 조치가 취해질 경우 단기적으로는 중소 중견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투신 부실처리 등 근본 해결책이 나오지 않으면 기업부문의 자금사정 악화가 신용보증기관의 연쇄부실로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박원재·이병기·김두영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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