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회생 힘모으자(상)]개혁막는「정치-행정」바뀌어야

  • 입력 1998년 5월 11일 19시 46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10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노사정의 고통분담을 바탕으로 개혁의 강도를 높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새로운 시작’과는 거리가 먼 양상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11일 여야 의원들이 경제분야 대정부 질의를 벌인 국회의사당. 이날 단상에 오른 의원들은 한결같이 “정쟁으로 인해 경제개혁이 지연되고 있다”고 ‘바른 소리’를 했다.

그러나 정쟁의 책임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모두 정쟁의 책임을 상대당 몫으로 돌리기에 바빴다.

이날도 야당의원들은 고건(高建)전총리와 임창열(林昌烈)전부총리의 환란책임론을 제기하는데 초점을 맞추었고 여당의원들은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의 검찰답변서 내용을 문제삼으며 반격했다.

새 정부 출범 후의 정쟁은 김종필(金鍾泌)총리서리 인준과 추경예산안 처리문제에서 시작돼 3개월간 주제만 바꿔가며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다.

이 바람에 경제회생을 위한 주요법안 20여건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특히 외국인투자 및 외자도입에 관한 법률개정안, 외국인 토지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률개정안, 외국인 투자자유지역 설치법안 등이 처리되지 않아 외국자본의 조기 도입에 큰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고통분담의 상징적인 사안으로 변호사 등 고소득 전문직에 대해 부가가치세를 부과하려던 정부의 시도 또한 현재 국회에서 발목잡혀 있다.

문정인(文正仁)연세대교수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경제법안을 최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여야 정치권이 다른 정치적 이유 때문에 이를 미루는 것은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 나라를 죽이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또 정치인들의 설익은 정책 남발과 사견 피력은 실물경제에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

공공부문의 개혁과 경제정책당국의 정책처리도 민간부문의 개혁을 자극하기엔 문제가 많다.

4월중순 기획예산위원회가 재정경제부 과학기술부 등 각 부처에 산하연구기관을 최대한 줄이라는 ‘산하연구기관 정비지침’을 내려보냈을 때의 사례.

정권 실세그룹의 모부처 장관은 “내가 연구기관을 그대로 두겠다는데 누가 떠들어.(기획예산위원회가) 예산을 쥐고 있으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가”라고 말했다.

결국 기획예산위는 4월말까지 내놓기로 한 ‘연구기관 정비방안’을 확정짓지 못한 채 ‘현행 연구소를 사실상 그대로 두고 경상비를 20% 깎겠다’고 후퇴했다.

일선 관료들의 행태도 이에 못지않다. 경제부처 모과장은 “무슨 일을 하든 어차피 나중에 문책을 받을텐데 나서지 말고 5년만 넘기는 게 상책”이라며 “도장 찍기(결정)를 미루면 되는데 굳이 책임질 일을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경제팀의 정책혼선도 문제다. 사전에 충분한 정책협의 없이 각 정책담당자가 꺼낸 말들이 정책의 대상주체들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

내년말까지 기업의 부채비율을 200%로 낮추겠다는 것으로 최종 매듭지어진 ‘200% 논쟁’이 대표적.

실업대책의 일환인 공공근로사업도 찬찬히 뜯어보면 쓴웃음을 짓게 한다. 실직자를 모두 채워도 모자랄 일자리에 집에서 놀고 있던 할머니 가정주부들이 일부 끼여있다. 실업대책의 의지가 현장까지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8일 차관회의를 통과한 자산재평가법 시행령도 관련 부처간 신경전으로 한달반이나 지연됐다. 평가기관 자격을 종업원 2백명으로 하느냐, 1백50명으로 하느냐 하는 사소한 문제 때문이었다.

또 최근의 경제정책은 제도나 시스템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먹구구식 인치(人治)로 흐르는 부분이 적지않다.

제도가 아닌 금융권간 협약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협조융자가 대표적 사례. 법률적 뒷받침이 없다보니 금융기관의 자의적 판단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이같은 정부의 명확하지 못한 개혁정책과 정치권의 정쟁이 재벌과 금융의 구조조정 지연과 도덕적 해이(모럴헤저드)로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앙대 김대식(金大植)교수는 “민간부문의 개혁을 선도할 수 있는 공공부문의 개혁이 가장 시급하다”며 “경제시스템도 복잡한 구도를 단순화하고 재경부장관에게 조정권한을 제도적으로 부여하는 제2의 소규모 정부개편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규진·박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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