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채협상 은행장들 『청문회 나가 당하는 기분』

  • 입력 1998년 3월 14일 20시 56분


한달여에 걸친 외채만기전환 협상 끝에 단기채 2백25억달러 중 2백13억달러가 장기채로 전환됐지만 ‘빚진 죄인’이 겪은 수모도 많았다.

지난달말부터 11일까지 외채전환을 위해 일본 유럽 미국 등지의 2백여 채권금융기관을 찾아다닌 은행장 6명은 “청문회에 불려가 당한 기분”이라고 털어놓았다. “배운 것도 많았다”고 하니 두고 볼 일이다.

▼“통계 좀 보자”〓김승유(金勝猷)하나은행장은 미국에서 채권금융기관들이 초청한 만찬에 참석, 8명의 채권자와 만났다. 김행장은 쏟아지는 날카로운 질문에 답변하느라 산해진미를 눈앞에 두고도 수프밖에 못먹었다.

가장 곤혹스러웠던 질문은 ‘업종별 대손율(꾸어준 돈이 부실화한 업종별 비율)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

금융기관으로서 당연히 파악해야 하지만 국내 은행들이 그동안 둔감하게 넘긴 부분으로 ‘잘 나간다’는 하나은행조차 챙기지 않았던 내용.

김행장은 “그 자리에서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게 너무 부끄러워 귀국하자마자 업종별 대출종류별 대손율을 산출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정치권을 못믿겠다”〓해외 채권자들은 “한국 국민이 선물로 받은 금붙이까지 내다파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특히 유럽계 금융기관 관계자들은 “노조(민노총)가 국난극복을 위해 양보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며 반색을 했다. 이 말을 들은 한국 은행장들의 얼굴이 펴졌다.

그러나 다음 한마디에 은행장들은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정상적인 총리인준 투표가 안되는 것인가.”

그들은 “근로자와 국민이 그처럼 합심하는데 한국의 정치인들은 왜 그걸 못하는가”라고 거듭 물었다.

▼“재벌이 문제다”〓홍세표(洪世杓)외환은행장과 함께 독일 지역을 돌았던 이갑현(李甲鉉)상무는 현지 은행관계자로부터 “은행의 기업에 대한 영향력을 높여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독일계 은행들은 한국 외환위기의 본질을 ‘기업 외채’의 문제라고 규정했다. 이번 외채만기연장 협상으로 금융기관 외채문제는 한숨 돌리게 됐지만 기업 외채문제는 여전히 불씨로 남아 있다는 지적이었다.

독일계 은행관계자들은 금융감독 당국이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감독하듯 은행들이 기업의 건전성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쓰면 뱉기냐”〓사우디아라비아에 간 이관우(李寬雨)한일은행장은 21명의 채권은행 관계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공세를 받았다. 특히 ‘아팠던’ 질문은 “단기채 연장은 해주겠지만 한가지만 묻겠다. 걸프전때 한국계 은행들이 사우디아라비아 은행들과 거래를 모두 끊은 이유가 뭐냐”는 것.

이행장은 “죄송하다”는 말 이외에는 달리 할말이 없었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입장이 역전된 셈. 걸프전때 ‘거래를 계속해달라’고 매달리는 중동계은행을 매정하게 뿌리쳤던 한국의 은행들이 이제와서 돈을 빌려달라고 애걸하자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정경준·이용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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