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금융단이 기아그룹에 부도유예협약을 적용한지 한달이 넘었지만 기아사태는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기아그룹은 협약 만료(9월29일)를 한달도 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경영권 포기각서 제출을 계속 거부하고 있고 채권금융단도 구체적 자금지원을 보류한 채 원리금 상환만 유예해주는 애매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기아 부도처리」로 방향을 수정, 이 그룹의 공중분해 가능성까지 예고되고 있다.
▼ 정부 움직임 ▼
재경원은 당초 기아그룹이 당연히 경영권 포기각서를 제출할 것으로 믿고 이를 전제로 긴급 운영자금 지원 등 기아 정상화방안을 마련했다. 지난달 19일엔 포항제철이 기아자동차에 대한 철강공급을 중단하려 하자 이를 즉시 시정토록 조치하는 등 나름대로 기아살리기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金善弘(김선홍)기아그룹회장이 버티기로 일관하고 관련 협력업체와 금융시장이 불안한 행보를 거듭하자 정부는 지원대책 대상에서 기아그룹을 빼버렸다. 7월말부터 지금까지 나온 정부대책은 기아그룹을 젖혀 놓은 채 관련 협력업체와 금융기관의 정상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이 신용파산의 위험에 처하자 지난 25일엔 한은특융지원을 포함한 금융시장 안정대책까지 발표했다.
안정대책의 약효도 약한 것으로 판단되자 정부는 28일 부도유예협약의 폐기 내지 보완이라는 초강수를 들고 나왔다. 정부는 결국 「기아의 부도처리 후 법정관리」로 입장을 정리한 뒤 이에 따른 충격을 최소화할 종합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 채권단 입장 ▼
제일은행 등 채권단은 『정부가 부도유예협약의 폐지를 검토하더라도 기아에 적용된 시한(9월29일)은 지켜질 것』이라면서 『그러나 기아측이 김회장의 사표제출을 거부하고 있는데 시한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반응이다.
채권단의 입장은 시종일관 김회장 등 경영진의 사표 및 인원감축에 대한 노조동의서가 제출돼야 1천8백억원의 긴급자금을 지원할 수 있다는 것.
제일은행 고위관계자는 『기아가 긴급자금 지원없이 9월말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만 그 이후는 종금사 부채 4조5천억원을 포함, 총 11조원의 원리금 상환 요구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채권단과 기아의 대결양상이 지속되는 한 기아그룹의 부도는 불가피하다는 게 채권단의 입장.
기아가 경영정상화의 길을 밟든 아니면 부도처리후 법정관리대상이 되든 간에 수조원을 떼일 위기에 처한 채권단의 피해는 불을 보듯 뻔하다. 특히 자본금 이상을 물린 종합금융사의 경우 기아자동차가 당장 부도처리되면 문을 닫는 회사가 속출하는 등 금융권에 주는 충격은 심각할 것으로 우려된다.
▼ 기아측 대응 ▼
이달말까지 1천8백27억원어치의 부동산과 1천98억원의 각종 자산을 매각할 계획이었으나 28일 현재 1천6억원(목표치의 55%), 1백62억원(14.8%)을 파는데 그쳤다.
28일 현재 16개 주요협력사가 최종 부도처리됐으며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는 한 연쇄도산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달말까지 3천억원 가량 어음의 만기가 도래, 최소한 30개사 가량이 추가로 무너질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달 들어 시중은행들이 기아자동차의 수출환어음을 매입하지 않는 바람에 기아자동차는 올해 수출목표치를 10만대 가량 낮춰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기아 부도처리 후 법정관리로 들어갈 경우 기아는 이를 막을 만한 대응책이 전혀 없다. 믿을 거라곤 「기아를 살려야 한다」는 동정여론 뿐인데 시간이 갈수록 이 여론마저 약해지는 추세여서 기아는 고민중이다.
한편 자동차 전문가들은 기아와 정부, 채권은행단이 모두 한발짝씩 물러나는 타협자세가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즉 기아는 김회장이 명예회장 등의 직책으로 일선에서 퇴진, 채권단과 정부의 체면을 세워주고 정부는 기아를 직접 지원하지는 못하더라도 자동차산업을 위해 협력회사를 지원하는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강운·임규진·이희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