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官界책임▼
한보부도사태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일관되게 『책임없다』는 것이다.
한보측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재무구조가 악화됐고 여기에 철강경기 하락과 방만한 경영까지 겹쳐 발생한 단순 금융사고라는 논리다.
그러나 한보철강의 제철소 설립계획에서부터 부도결정이 날 때까지 정부가 개입한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검찰도 수사초기에 전현직 관계(官界)인사들을 소환, 조사할 계획이었으나 정치권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朴在潤(박재윤)전통상산업부장관, 韓利憲(한이헌) 李錫采(이석채)전 현 경제수석이 「참고용」으로 조사받은 것이 관가에 대한 검찰수사의 거의 전부다.
한보사태와 관련, 제기된 정부개입 의혹은 대략 다섯 가지다.
첫째, 일사천리로 진행된 공장부지의 매립과정이다. 매립당시부터 특혜시비가 있었는데도 건설교통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소재가 전혀 규명되지 않았다.
둘째, 「과장전결」사항이라고 통산부가 밝힌 코렉스공법 도입과정의 의혹이다. 대규모 공장에는 적합치 않다는 코렉스공법을 적극 추천하고 지원한 배경이 설명돼야 한다.
셋째, 한보철강의 투자규모가 90년 1조2천억원에서 96년 5조7천억원으로 다섯배가량 불어났는데도 정부는 뒤늦게 알았다고 밝히고 있다.
넷째, 2년 사이에 3조2천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거액이 한보철강에 대출됐는데도 정부는 『개별기업에 대한 대출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만 말하고 있다.
다섯째, 자금난을 겪고있던 한보그룹이 유원건설 상아제약 등 굵직한 업체를 대거 인수한 배경도 수수께끼다.
〈김회평기자〉
▼부도경위▼
李錫采(이석채)경제수석은 최근 사석에서 『한보철강은 부도를 낸 것이 아니라 부도가 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보부도처리에는 경제적 논리로만 해석하기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다.
한보철강이 심각한 자금난을 겪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하반기부터다.
지난해 10월쯤 증권시장에서 「한보의 자금사정이 어렵다」는 분석자료가 나오고 이것이 증시루머집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됐다.
이런 와중에 제일 산업 조흥 외환은행 등은 지난해 7∼9월 사이 각각 1천억원씩 4천억원을 사실상 협조융자형식으로 지원했다.
시중은행 한 임원은 『거부못할 곳으로부터 요청이 와서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채권은행들이 한보철강의 자금흐름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청와대 등에 심각하게 보고한 것은 지난해 12월.
청와대는 한보철강의 처리문제는 은행들의 판단에 맡기겠다며 공을 채권은행단에 넘겼다.
은행들은 당국의 진의를 몰라 깊은 혼란에 빠졌고 지난달 부도 10여일전에 한꺼번에 1천억원대의 어음이 돌아와 부도위기에 몰렸던 한보철강에 협조융자형식으로 1천4백50억원을 지원, 부도를 막아줬다.
그러나 곧 은행들은 鄭泰守(정태수)총회장이 경영권을 포기하거나 은행관리중 택일을 하라는 강경입장으로 선회했다.
한보측은 후취담보로 제공했던 냉연 및 열연공장이 작년말 완공돼 감정기관의 평가가 끝날 경우 담보가액이 충분하다는 논리로 추가대출을 요구했을 때였다.
그러나 은행들은 담보가액에 대한 평가가 나오기도 전에 강경입장으로 선회했다. 은행자체만의 판단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부도는 청와대의 주도적인 결정에 의해 이뤄졌다.
〈백승훈기자〉
▼정태수발언▼
鄭泰守(정태수)한보그룹 총회장은 집요한 추궁에도 입을 굳게 다물어 수사검사를 애먹여 「자물통」이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이 때문에 정총회장이 자신이 돈을 준 인사들의 명단을 얼마나 밝힐 것인지에 수사의 성패가 달렸다고 할 정도였다.
검찰은 정총회장이 과거에 조사를 받을 때처럼 구속된 일부 인사외에는 별다른 진술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검찰고위관계자는 『억대 이상의 로비자금은 정총회장이 직접 전달했지만 이름을 제대로 밝혔다고 보기 어렵고 수천만원대의 돈을 주로 전달한 金鍾國(김종국)전한보그룹재정본부장의 진술로 일부 정치인의 금품수수가 드러났다』고 말했다.
이는 정총회장이 거액을 준 거물급 실세 정치인은 이번 수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정총회장은 왜 몇 사람의 혐의만 진술했을까. 검찰주변에서는 정총회장의 입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검찰이 정총회장과 모종의 거래를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고 있다.
특히 정총회장의 후계자인 鄭譜根(정보근)한보그룹회장이 다치지 않도록 하는 조건으로 몇사람을 불어주는 협상을 벌였을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이같은 관측은 정회장이 기소되지 않을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상당한 설득력을 갖게 됐다.
정총회장이 「거물」은 감춘 채 「미운 놈」만 찍어주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김홍중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