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임기를 앞두고 공개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공식 초상사진이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정면을 강하게 응시하는 모습입니다. 본인의 마음에 쏙 들었기에 선택된 커트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생 몇 번 증명사진을 찍어보셨나요?
저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입학, 여권과 비자 발급, 운전면허나 주민등록증 발급, 입사 시험 등으로 대략 20여 차례 증명사진을 찍은 것 같습니다. 증명사진은 신분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개인의 얼굴 변화를 기록하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최근 저는 증명사진이 기록이 아니라 피사체인 저를 미화하는 도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해 말,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려 동네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었습니다. 동네 사진관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사진을 찍으러 와 있었습니다. 증명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 가족사진을 찍으러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간단한 헤어 고정 제품과 빗을 받아 머리를 정리한 후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셔터가 10번도 채 눌리지 않은 채 촬영이 끝났습니다. 보통 사진기자들이 피사체를 촬영할 때 100장 이상을 찍어서 가장 자연스럽고 뉴스에 적합한 표정을 골라내는 과정과는 차이가 컸습니다. 이어서 저는 사진사의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사진사가 고른 3장의 베스트 컷 중 하나를 골랐습니다. 1시간 후 사진을 찾으러 갔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진 속 저는 너무 어려 보였습니다. 머리는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다듬어져 있었고, 피부는 지나치게 뽀얗게 보정되어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던 눈가의 주름도 모두 펴져 있었고, 눈꼬리도 살짝 올라간 듯했습니다. 규정상 6개월 이내에 촬영한 사진을 제출해야 했고, 젊어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그대로 주민센터에 사진과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 선배 사진기자가 떠올랐습니다.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딸의 증명사진을 보고 다시 찍으라고 했다는 일화였습니다. 저도 다시 찍어야 했던 걸까요?
보름 후, 주민등록증을 수령하며 지갑에 ‘몰래’ 넣었습니다. 사진 속 모습이 내 기억 속의 젊은 시절 같기는 했지만, 현재의 나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진작가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며, 미국 입국 심사대에서 사진과 얼굴이 달라 혼란을 준다며 “죄송합니다”라고 했다는 우스갯소리를 했습니다.
5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 나이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사진이 오히려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혹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게 아니라 “그럴듯하게 기록”하는 게 정답인가하는 질문을 다시 해봅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5년 1월 1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의 증명사진입니다. 선생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국무총리를 지냈습니다.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함경남도 단천 출신이며 호는 성재(誠齋)입니다. 이날부터 닷새간 동아일보는 이동휘 선생이 국내 시민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연재했습니다. 1873년에 태어나 1925년 당시 52세였던 선생의 모습은 지금의 50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대의 무게를 짊어진 어른의 모습입니다.
52세 이전에 촬영된 이동휘 선생의 사진/ 동아일보 1925년 1월 18일자 지면
DB에는 선생의 사진이 5 종류 정도 남아 있으며, 그 중 증명사진 형식은 2장뿐입니다.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시대가 시대이다보니 사진이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소중한 기록이기도 하구요. 사진을 보며,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으시나요? 좋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이동휘 선생의 철학과 그가 꿈꾸었던 미래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100년 전 신문에 연재된 글을 읽기 쉽게 정리해서 아래 첨부합니다.
사랑하는 내지 동포에게 -러시아에서, 성재 이동휘- 나는 지금 동아일보를 통해, 극심한 기근에 고통받고 있는 수백만의 형제들의 고통에 함께 울며, 이 고통을 해결할 길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살펴보려 합니다. 현재 우리 민중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혹독한 억압을 받으며, 굶주림까지 겪게 된 것은 그야말로 눈 위에 또다시 서리를 맞는 격입니다. 기근은 자연재해가 원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자연재해와 인위적인 착취가 겹치면서, 조선의 무산 계층은 생존의 길을 찾으려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주들의 창고에는 곡식이 썩고, 부자들의 금고에는 돈에 녹이 슬어가지만, 사회에는 ‘형이 배부르면 동생이 굶주린다’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은 현대 사회 제도의 부끄러운 유산입니다. 얼마 전, 통천의 한 학교에 다니던 14세 박춘혁 군이 책보를 맨 채 길에서 얼어 죽은 사건은, 자본주의 사회의 비정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비극입니다. 조선의 무산 계층은 굶주림을 피해 만주와 시베리아로 흩어지고 있지만, 그것도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이제 사회의식을 바꿔야 합니다. 민중의 의식으로 사회를 지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비정한 세상은 계속될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고도 굶주리는 노동자들, 이 불합리하고 비정한 세상을 누가 그대로 둘 수 있겠습니까?
동아일보에서 해외 동포를 위로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중러 국경 지역의 학교와 공공단체에 기부해 공익사업을 펼치고 있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특히 고려도서관에도 많은 책을 기증해주신 것에 감사를 표합니다. 내지 동포들은 해외 생활을 동경하기도 하지만, 이곳의 현실은 단조롭고 문화적으로 매우 빈약합니다. 과거 러시아의 구황제 시절, 이민족에 대한 억압이 심했을 뿐 아니라, 우리 동포들 대부분이 생활기술이 부족했던 탓입니다. 다행히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 이후, 계급과 민족의 차별 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조국이 있다는 원칙이 적용되었습니다. 그 결과 현재 연해주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약 20만 명에 달합니다. 그러나 60여 년 동안 입적한 고려인 중 실제로 땅을 분배받은 사람은 30여 가구에 불과했고, 그나마 대부분이 소작농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22년 소련이 연해주까지 점령한 후, 불과 2년 만에 고려인들에게 분배된 땅의 규모가 이전 60년 동안과 맞먹게 되었습니다. 또한 교육 측면에서도, 과거 40여 개 학교에서 러시아어만 가르치던 것을 현재는 200여 개 학교에서 한국어를 정규 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변화는 소련 헌법과 공산당의 방침 덕분이며, 현재 노동자와 농민의 문화 수준이 급격히 향상되고 있습니다. 최근 동아일보에 ‘연해주 고려인이 자치공화국을 세웠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이는 다소 성급한 보도입니다. 소련 헌법상 각 민족은 자유롭게 자치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통계와 특정 지역에의 집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현재 준비 중입니다. 러시아 당국은 1918년 이전 이주한 고려인에게는 입적권을 허용하고, 그 외에도 가난한 농민에게는 최소 3만 4천 평의 땅을 나눠줄 방침입니다. 고려인 대표들은 모든 고려인에게 제한 없이 러시아 시민권을 부여하고,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민권으로서 토지를 나누어줄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은 “무제한 시민권 부여는 일본의 토지 공황을 완화시키고, 조선 내 무산자의 해외 이주로 인해 국내 혁명을 지연시킬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며 우리는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가 토지를 아끼기 위함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무산자들의 연대를 강화하려는 것임을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아의 동지들이여! 앞에서 말한 것처럼 러시아 영토에서 고려족의 장래 생활은 더욱 번영할 것입니다. 자치가 성립됨으로써 정치적으로 발전할 것은 물론이며, 그 지도 역시 특정 개인이 좌우할 수 없고, 세계 혁명을 지배하는 중심 기구의 계획에 따라 우리는 이를 따르고 실행할 뿐입니다. 러시아 영토의 주민은 자신의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하여 내지나 다른 동포들의 생활이 파괴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습니다. 이제 중국 영토의 동포들에게 한 마디 하고자 합니다. 그들도 러시아 영토 주민들과 함께 60~70년의 이주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길림성 동남로 연길도 8현(연길, 화룡, 왕청, 훈춘, 동녕, 영안, 돈화, 액목)을 중심으로, 연길과 화룡 두 현만 해도 거의 10만 호에 달합니다. 1920년에 일본이 북간도에서 무명 지휘관으로 토벌을 감행하면서 정치적 관계자들의 이주가 시작되었고, 현재는 수백 호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이주할 장소는 충분합니다. 만일 길회 철도가 개설된다면,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이익은 불분명하지만, 고려 이주민들에게는 많은 편의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리고 봉천성 전 현에 흩어져 있는 주민 수는 10만 호가 넘지만, 일정한 지역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으며, 더욱이 소작 생활로 인해 북간도 일대의 주민만큼 생활이 안정되지 못한 상황입니다. 장래 이주가 유망한 지역은 중동선 일대와 길림성 동북로 의란도이며, 송화강 연안의 부금, 보청, 요하, 수원 등의 현은 중국 토착민이 적고, 기름진 땅이 수천 리에 달하며 수리 농업이 유망합니다. 이 지역들은 저도 일찍이 답사한 바 있으며, 지금도 우리 동포들이 개척 중입니다. 교통의 편리성과 미개간지의 개척 가능성을 고려할 때, 위의 지역들이 가장 유리할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에 일부 인사들이 하얼빈을 중심으로 위 지역 개척 운동을 한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만일 정치적 목적이나 대자본 투하를 통한 중국 관료들과의 결탁으로 농민 착취를 경영한다면, 이는 허황된 광고일 뿐, 실제로는 여러 난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지에서 신뢰할 수 있는 단체, 더 나아가 동아일보의 중재로 이루어진다면 성공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동아의 동지들이여! 우리는 자신의 금수강산을 버리고 남의 영토에서 황무지를 개척한다는 이야기가 너무나 고달픕니다. 그러나 조선에서 정치적으로 차별받고, 동양척식회사의 횡포와 지주의 착취로 생활의 안전이 없는 현실입니다. 일본인을 우선시하는 총독정치는 아무런 보장이 없습니다. 가까운 예로, 최근 진주 도청을 부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조선인을 무시하고 일본인의 번영만 도모하는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이에 경남도민이 결사적으로 반대 운동을 한다는 귀보의 특파원 보도는 저의 상념을 자극합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조선의 무산 대중과 일본의 무산 대중은 자연히 연대하여 생활의 쾌락과 자유를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아의 동지들이여! 최근 세계 정세, 특히 동양에서 중국의 군벌들이 제국주의자들의 분열 정책에 이용당해 동족 간의 싸움이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리하여 봉옥상이 갑작스럽게 반란을 일으켜 오패부가 타도되고, 조곤이 퇴위하자 단기서가 집권하게 되었고, 장작림이 실권을 장악하며 손문의 이상적인 정책이 발표되는 등 흥미로운 정국이 펼쳐졌습니다. 마치 사냥터에서 누가 사슴을 차지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 사슴을 얻는 것은 중국 군벌들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제국주의자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요즘의 정세를 보면 안복파가 득세하고, 봉천군이 일본 군벌의 조종을 받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은 큰 이익을 얻고 있으며, 남북 만주의 세력권은 여전히 존재하고, 장강 일대에서 영국과 미국의 기득권을 빼앗을 기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국제 자본들이 시장을 놓고 다투며 전쟁을 벌이는 이유라고 합니다. 우리 조선인의 입장에서 일본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는 것을 반길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상황을 지혜롭게 이용할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이번에 손문이 제시한 정책이 일부라도 실현된다면, 중국령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중국의 새로운 정부에 정치적 참여를 강력히 요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자치 운동을 펼치며 생활의 실력을 기르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저는 현재 러시아령 주민들의 경험을 보며, 중국령 주민들도 정치적 실력을 갖추기를 갈망하고 꿈꾸어 봅니다. 이는 현재 중국령 주민들이 국적과 정치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편에서 무모한 희생을 치르는 것보다, 운동 방식을 바꿔 대세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현명한 혁명 지도자의 역할일 것입니다. 동아의 동지들이여! 제가 미숙한 정치적 논평을 늘어놓아 다소 경솔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미 말문을 연 김에 감추지 않고 솔직히 밝히는 것은 저의 성격이며, 말하지 않을 수 없는 현 상황의 흐름이라 여깁니다. 일본의 현재 상황은 신문 보도만 보더라도, 지난해 대지진의 충격으로 국민들의 불안이 커졌고, 여러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하는 듯합니다. 최근 일본 정부는 학교에 군사 교육을 강요하고 있으며, 이에 학생들과 재야 인사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국수주의 세력의 발호와 무산계급 운동의 좌경화, 보통선거 실시로 무산 정당의 조직 가능성이 커진 것도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조선의 무산계급 대중은 일본의 무산계급과 같은 운명에 처해 있기에 함께 행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포 수단을 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운동이 아직 기반이 확고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압박이 심해 선전 활동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발표된 언론을 조선에서는 금지하고, 일본에서 출판된 서적을 조선에서 압수하는 것만 보더라도, 조선총독부의 지배가 얼마나 특별하게 차별적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아의 동지들이여! 최근 세계 정세와 동양에서의 변화는 특히 중국 군벌들이 제국주의자들의 분할 지배 정책에 이용되어, 같은 민족끼리 싸우는 참혹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펑위샹(馮玉祥)의 갑작스러운 반란으로 우페이푸(吳佩孚)가 무너지고, 차오쿤(曹錕)이 퇴위한 후, 돤치루이(段祺瑞)가 정권을 잡고 장쭤린(張作霖)이 실권을 쥔 가운데, 쑨원(孫文)이 자신의 이상적인 정치 견해를 발표한 일은 무척 흥미로운 정국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혼란의 결과로 중국의 미래가 누구 손에 떨어질지 예측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상황이 결국 중국 군벌들이 아닌, 그 배후에 있는 제국주의 세력의 먹잇감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최근 정세를 보면, 안푸파(安福派)가 고개를 들고 펑텐 군벌(奉天軍)이 일본의 조종을 받으며 움직이는 듯합니다. 이를 보면 일본 군벌들이 큰 이득을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남북 만주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고, 장강(長江) 지역에서 이미 확보했던 영국과 미국의 영향력마저 되찾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세는 결국 국제 자본의 시장 쟁탈전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원인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조선인들의 입장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확대되는 것을 기쁘게 바라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실망할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쑨원의 정책이 실현된다면 중국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은 신정부에 정권 참여를 적극 요구해야 합니다. 점진적으로 자치 운동을 벌여 생활 기반을 확보해야 합니다. 저는 러시아에 있는 동포들의 현재 경험을 보며, 우리도 정치적 실력을 갖추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지금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정치적으로나 국적상으로도 주장을 펼쳐야 할 중요한 시점입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편에서 무모하게 희생되는 것보다, 오히려 운동 방식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를 정확히 파악하고, 현명하게 이끄는 혁명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동아의 동지들이여! 제가 다소 미숙한 정치적 견해를 펼친 것 같아 송구합니다. 그러나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제 생각을 솔직하게 전하는 것이 제 본성이고, 이 시대의 흐름을 보며 침묵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일본의 현 상황을 신문 보도만 보아도, 지난해 대지진의 충격으로 민심이 불안정하고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듯합니다. 최근 일본 정부가 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강제하자,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국수주의 세력의 날뛰는 모습, 무산운동의 좌경화, 보통선거법의 시행으로 무산정당이 결성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조선의 노동자 대중도 일본의 노동자 대중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만큼, 이들의 움직임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운동 기반이 아직 취약할 뿐 아니라, 탄압이 극심해져 선전 활동에 지장을 줄 것입니다. 일본에서 발표된 기사조차 조선에서는 허용되지 않고, 일본에서 출판된 서적이 조선에서 압수되는 현실만 보아도 총독부의 특별한 차별 정책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공포 수단에 대한 것은 나의 의견만이 아닙니다. 1921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레닌 동지를 만났을 때의 대화가 떠오르는군요. 그때 그는 특히 소규모의 폭력을 사용하지 말 것, 일본의 무산자와 연대할 것, 대중을 선전으로 각성시킬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조선 철도 노선을 가리키며, 조선의 3.1운동이 이 교통의 편의를 이용했다고 하면서, 조선의 민족운동은 이제 첫 단계에 들어섰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선에서 모든 운동의 경향을 보면, 각 단체의 발표된 정강을 막론하고 모두 사회운동으로 급격히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는 큰 진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무산운동 단체들이 상호 연대하여 실행에서도 일치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동아의 동지들이여! 무산계급을 대표하는 운동의 지도자들은 이상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와 농민이 직접 참여하는 운동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더욱이 비밀 지역에서 활동하는 방법, 국제적 운동과의 연계, 조직의 중심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현재 조선의 무산운동은 다만 경성을 중심으로만 이루어지고 있으며, 상호 경쟁하며 실제 노동자와 농민 계층에 기반을 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서울에서 광고성 운동만 하지 말고, 각 지방으로 흩어져 실제 노동자, 농민 계층과 접촉하여 그들의 기초 문화부터 계몽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실생활을 목표로 하는 사회운동은 모든 대중이 일치단결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레닌 동지는 말하기를, 혁명 사업은 결코 거창한 일이 아니라, 노동자는 공장에서, 농민은 들판에서, 학생은 학교에서, 여성은 부엌에서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혁명 정신만을 일관되게 유지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의회를 통한 문화운동이 ‘제3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한창입니다. 첫 번째 전선은 사회를 건설하는 시기였고, 두 번째 전선은 파괴된 경제를 회복하는 시기였으며, 현재의 세 번째 전선은 문화를 일으키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조선의 무산운동은 첫 번째, 두 번째 전선보다도 세 번째 전선에 먼저 힘써야 하는 것이 현세의 요구에 맞는 운동일 것입니다. 따라서 대학을 운영하는 것보다 강습소나 강연회를 열어 노동자와 농민의 무지를 퇴치하고, 인격 향상과 생활 평등을 점진적으로 깨우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과거 민족운동은 분열로 인해 대동단결이나 기관 통일 등을 주장하며 위기를 타개하려 했지만, 이익의 상충과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언제나 대동통일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무산운동은 반드시 단결할 수 있으며, 다만 지도자들 간의 의견 충돌로 인한 분열이 문제일 뿐, 결코 무산계급 자체가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운동이든 지도자의 책임은 무겁고도 어렵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동아의 동지들이여! 이제 글을 마무리하며 한 가지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준비 없이 흥분된 언어를 쓰거나 조리가 부족하고, 문맥이 연결되지 않거나 혹은 모순된 구절은 없는지 검토해 주시고, 많이 다듬어 주시기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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