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같이 날 예뻐했던 남편 김수영 시인…늘 멈추지 않는 자유 정신으로 펜 잡아”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월 19일 12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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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수영 시인 ‘토끼띠 아내’ 김현경 여사

고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여사가 18일 경기 용인시 자택에서 진행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남편은) 진짜 알맹이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며 웃고 있다. 용인=원대연기자 yeon72@donga.com
“닭하고 토끼하고가 의좋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의식의 심부에는 어떤 미신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닭띠이고 나의 아내가 바로 토끼띠이니까 말이다.…이들의 궁합이 더 신기해 보인다면 신기해 보인다.”

시인 김수영(1921~1968)이 1960년대 남긴 에세이 ‘토끼’에는 이 같은 내용이 나온다. 생업으로 닭을 길렀던 시인이 “닭을 기르는 집에는 반드시 토끼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키운 토끼를 보고 떠오른 단상을 적은 것이다. 글에 등장하는 ‘토끼띠 아내’ 김현경 여사(96)를 19일 경기 용인시 자택에서 만났다. 김 여사는 상수(上壽)를 바라보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운 모습이었다.

김 여사와 김 시인의 인연은 81년 전인 19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네 아저씨의 친구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어요. 행색이 아주 기괴했어요. 눈은 부리부리 하고. 제가 힘들던 시절 ‘같이 문학하자, 너 재주 있다’며 만나기 시작했죠. 우리 집 담벼락에 와 김 시인이 휘파람으로 베토벤 교향곡 ‘운명’을 부르면 제가 ‘너 왔구나’하고 나가 데이트했죠.”

김 시인은 그때부터 자신의 시에 쉽게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만날 때마다 서로 써온 시를 바꿔 읽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김 시인이 ‘똑같은 시는 쓰면 안 된다’며 가져 온 종이를 찢더라고요. 당시 시인이 1945년 문예지 ‘예술부락’에 발표한 시 ‘묘정의 노래’을 읽고 조지훈 시인이 깜짝 놀랄 정도였는데 말이죠.”

김수영 시인의 젊은 시절 모습. 동아일보DB
김수영 시인의 젊은 시절 모습. 동아일보DB
김 시인은 1949년 ‘토끼’라는 시를 썼다. 시는 ‘토끼는 입으로 새끼를 뱉으다/ 토끼는 태어날 때부터/ 뛰는 훈련을 받는 그러한 운명에 있었다’로 시작한다. 김 여사는 “여동생이 우리 신혼집을 찾아와 ‘친정에 토끼가 새끼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주자, 내가 토끼띠라는 걸 알고 있던 김 시인이 단숨에 써내려간 시”라며 “토끼같이 날 예뻐했다”고 했다.

김 시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가세는 기울고 병치레로 고생하다 김 여사를 만났지만 1950년 결혼 직후 6˙25가 터졌다. 김 시인은 북한 의용군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했다. 해방 이후 ‘폭포’ ‘푸른 하늘을’ 등 강렬한 현실의식을 추구한 시를 쏟아냈지만 1968년 불의의 사고로 그가 ‘토끼같이 예뻐했던’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기고 숨졌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지난 요즘에도 김 시인이 남긴 시와 산문이 갈수록 더 많이 연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 여사는 “남의 흉내를 안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부벌렌데, 정직하고 진실했어요. 늘 본질을 추구하면서 새롭게 쓰고 차원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죠. 머물지 않고 늘 앞서가는 자유정신으로 펜을 잡았죠.”

김 여사는 ‘김수영의 시는 난해하다’는 일각의 평가에 대해 “표현의 방식이 높고, 생각하는 차원도 보통이 아닐 뿐 난해한 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상주사심(常住死心·늘 죽을 각오로 살아야한다)’. 김 시인은 이같은 자신의 좌우명대로 살다 갔다. 김 여사는 “지금 읽어도 진부하지 않고 새롭게 느껴지는 시를 쓰신 비결은 공부였다”며 “철학책을 탐독했는데,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 얘기를 많이 해서 충무로에 갔다가 전집을 사다드리니 좋아하셨다”고 회상했다.

김 여사는 눈이 그렁그렁한 채로 말을 이어갔다. “요즘도 혼자 집에 있으면서 노상 일과가 김 시인의 책을 읽는 거예요. ‘김수영 학문’이 생길 정도로 많이 읽히고 인정받는데,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생각이 들어…안타깝죠.”

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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