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안 나가던 그 책, 그래픽노블로 나왔네[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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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그래픽노블/커트 보니것 원작·라이언 노스 각색·앨버트 먼티스 그림·공보경 옮김/200쪽·2만2000원·문학동네

이호재 기자
이호재 기자
1944년 12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군 병사 빌리는 낙오된다. 추위에 떨면서 독일군을 피해 다니던 빌리는 나무에 기대 잠시 쉬다 갑작스레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한다. 빌리는 1945년 포탄이 쏟아지는 독일 드레스덴에 숨어 있다가, 1955년 미국 뉴욕에서 성공한 사회인으로 대중 연설을 하고, 1976년 병원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다가 다시 1944년 12월로 돌아온다. 빌리는 자신이 어느 시공간으로 흘러갈지 통제할 수 없다. 다음에 인생의 어떤 부분이 펼쳐질지 알 수 없기에 빌리는 늘 두려워한다.

이 황당한 이야기는 미국 소설가 커트 보니것(1922∼2007)이 1969년 발표한 장편소설 ‘제5도살장’의 내용이다. 전쟁을 겪은 사람은 전쟁이 끝나도 고통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전쟁에 갇혀 있다는 점을 ‘시공간 여행’으로 표현한 것이다. 전쟁의 야만성을 고발한 ‘제5도살장’은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반전 시위가 미국에서 한창이던 때 발표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명작으로 자리 잡았다. 다만 빌리가 마치 정신분열을 겪는 것처럼 서술돼 읽기 난해한 작품으로도 불렸다.

하지만 ‘제5도살장’을 기반으로 만든 이 책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만화와 소설의 중간인 그래픽노블 형식을 취하면서 직관적으로 이야기를 각색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각 등장인물의 성격은 에피소드가 담긴 세 컷의 만화로 표현한다. ‘롤런드 위어리’라는 인물이 과거에 타인을 때렸던 사건을 보여주면서 폭력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점을 전달하는 식이다.

그림 역시 훌륭하다. 흰 눈이 가득한 벌판을 초록색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걸어가는 쓸쓸한 모습, 연합군의 폭격 직후 드레스덴이 달 표면처럼 황폐하게 변해버린 끔찍한 광경은 원작자의 글만큼 생생하다. 빌리가 갑작스럽게 외계 행성의 동물원에 전시되고, 외계인들이 빌리와 대화하는 장면처럼 원작자의 독특한 상상도 그림으로 그럴듯하게 살아났다.

최근 작품성은 높지만 가독성이 낮았던 명작의 그래픽노블이 국내에 출간되는 것도 이 같은 장점 때문일 것이다. 미국 소설가 프랭크 허버트(1920∼1986)의 ‘듄 그래픽노블’(황금가지)은 지난해 2월 1권에 이어 지난달 14일 2권이 소개됐다. 러시아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의 ‘죄와 벌 그래픽노블’(미메시스)도 지난해 11월 국내에 출간돼 화제를 모았다.

최근 출간되는 그래픽노블은 ‘만화로 만든 ○○○’ 같은 책과는 다르다. 글의 분량이 만만치 않아 읽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작화 역시 수준이 높다. 어린이, 청소년보다는 성인 독자를 타깃으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해외에선 이미 주류로 자리 잡은 그래픽노블이 국내 출판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명작 그래픽노블이 속속 출간돼 인기 끌기를 기대해본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그래픽노블#제2차 세계대전#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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