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서 출토된 조선전기 활자
세조때 불경-성종때는 시집 등
을해자 간행물 글씨체와 가까워
지난해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일대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32점 가운데 한글 활자는 600점. 훈민정음 창제 당시 표기가 반영된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 활자를 비롯해 세종 재위 기간인 1434년에 만들어진 ‘갑인자(甲寅字)’ 53점이 포함돼 주목받았다. 이는 1450년대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금속활자보다 최소 16년 앞선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로 꼽힌다.
이 한글 활자로 조선의 왕들은 어떤 책을 만들었을까. 국립고궁박물관이 13일 수도문물연구원과 공동 주최하는 ‘2021 인사동 발굴, 그 성과와 나아갈 길’ 학술대회에서 출토된 한글 활자로 어떤 책을 출간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한 논문이 공개된다.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고문헌관리학과 교수는 ‘인사동 출토 한글 금속활자 고찰’이라는 논문을 통해 지난해 출토된 한글 활자 중 일부가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능엄경(楞嚴經)’ 등 15, 16세기 출간된 을해자(乙亥字) 간행물 13권의 글씨체와 가깝다고 분석했다. 불설아미타경은 석가모니가 아미타불의 공덕이 장엄함을 설명한 불경으로, 불교 친화적이었던 세조 집권 시기인 1461년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현존하는 인쇄물에 드러난 글씨체의 변모 양상으로 갑인자(甲寅字), 을해자(乙亥字), 을유자(乙酉字), 경서자(經書字) 등 4가지로 활자를 분류해 왔는데, 지난해 조선 전기 한글 활자가 대거 출토되면서 실체가 확인됐다. 출토된 한글 활자 600점 가운데 386점을 차지하는 을해자는 1455년 조선 초기 문신 강희안(1417∼1464)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만든 금속활자다. 옥 교수는 조선 전기 간행물과 실제 출토된 한글 활자의 모양새를 비교 분석해 해당 활자로 불설아미타경 등 을해자본 13권을 펴낸 것으로 파악했다.
해당 한글 활자로 출간된 책 목록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일례로 지난해 출토된 을해자 활자 중 일부는 성종 때인 1482년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의 본문 글자와도 유사해 해당 책 출간에도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책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한글로 풀어낸 국내 최초 국역 한시집이다.
한글 책을 출간해 백성에게 생활 지식을 전파하려 했던 사례도 확인할 수 있다. 중종 집권 시기인 1541년 출간된 수의서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 언해본 역시 지난해 출토된 을해자 한글 활자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소, 말, 양, 돼지 등 가축에서 발생하는 여러 전염병에 대한 치료법을 담고 있다. 당대 가축 3515마리가 폐사됐을 정도로 피해가 심각해지자 중종이 나서서 대처 방안을 담은 한글 책을 출간해 백성에게 전하려 했다.
옥 교수는 “을해자 활자는 약 150년간 사용되는데 왕이 어떤 사상을 중시했느냐에 따라 각각 다른 간행물이 제작됐다. 불교 친화적이었던 세조는 활자로 불경을 만들었고, 문예를 중시했던 성종은 시집을 출간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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