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뒷날개]깊이는 속도에서 나오고, 혁명가는 신간을 읽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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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꿈꾼 독서가들/강성호 지음/332쪽·1만8000원·오월의봄

인문학 책을 만들 때 최대 난제는 깊이냐, 속도냐다. 완성도 높은 책을 오래 걸려 만들까, 시대에 호응하는 책을 빨리 낼까. 출판 전문지 ‘기획회의’는 “속도의 편집”을 택할 것을 주문한다. 난세에는 오래가는 깊이를 추구하기보다 독자에게 빠르게 다가가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동의한다. 성공하기가 어려울 따름이다.

이 책은 깊이는 속도에서 나온다는 깨달음을 주는 역사책이다. 요동치는 20세기에 책은 가격 대비 성능이 뛰어난 매체였다. 당대 혁명가들은 신간을 마치 지금의 얼리어답터처럼 득달같이 구해 읽었다. 일본 중국 러시아를 넘나드는 거물도, 비밀 독서회를 꾸리는 학생들도 가방 속에 꼭 책을 넣고 다녔다. 지금은 고전이지만 약 100년 전만 해도 동시대 작가였던 러시아 작가 레프 톨스토이(1828∼1910)의 인기가 우리나라에서 특히 대단했다. 중국 대륙을 누빈 항일 운동가이자 시인 김산(1905∼1938)의 주머니에는 톨스토이의 에세이 ‘인생독본’이 들어 있었다. 소설가 홍명희(1888∼1968)는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니나’가 일본어로 번역되기를 기다리다 못해 영역본을 사서 읽었다. 시인이자 화가인 나혜석(1896∼1948)은 한국 최초의 페미니즘 논설에서 톨스토이 장편소설 ‘부활’의 주인공 카튜샤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꼽았다. 타락으로 떠밀렸던 카튜샤가 정신적으로 부활한다는 구원 서사에 감응했으리라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사료가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책은 여성 독서가들을 조명한다. 사상가이자 스웨덴 교육가 엘렌 케이(1849∼1926)가 쓴 교육학 책 ‘어린이의 세기’는 식민지 조선 페미니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을 탐독한 최영숙(1906∼1932)은 스웨덴으로 유학을 간 첫 번째 동양인이었다. 최영숙은 스톡홀름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고향의 여성 노동자들이 처한 악조건을 개선하겠다는 결심으로 귀국한다.

아끼는 책을 품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대륙을 누비는 이야기가 장쾌한 만큼 나는 ‘혁명가의 최후’를 읽기가 두려웠다. 한국 근대사에서 최후에 성공한 역사 인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 제목이 ‘독서를 열심히 한 혁명가’가 아니라 ‘혁명을 꿈꾼 독서가’인 이유는 인물평에서 빛난다.

최영숙은 마땅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젊은 나이로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시대를 앞서간 자의 비참한 말로가 아니다. 저자는 식민지 조선사를 협력이냐 저항이냐는 이분법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혐오와 차별을 겪어야 했던 시대”로 보자고 제안한다. 최영숙은 사상서를 두고 깊이 있는 분석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자신과 동포들을 억압하는 사회에 선진 노동 시스템을 도입하려 한 페미니스트다. 독서의 역사란 결국 책을 자기 삶에 품은 사람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 책으로 배웠다.



신새벽 민음사 편집부 논픽션팀 과장
#깊이#속도#혁명가#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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