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PN 출연 5분→1시간으로…美 야구팬들에게 유명인된 한국 음악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28일 19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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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망원동 작업실에서 24일 만난 음악가 전상규 씨는 “15년간 교촌치킨, 에쓰오일, 삼성전자, SPC, 빙그레 등 
다양한 광고 음악을 만든 경험도 응원가 즉석 작곡에 도움이 됐다. 요즘 미국 야구 팬들의 메시지가 쏟아져 들어온다”며 웃었다. 양회성기자 yohan@donga.com
서울 마포구 망원동 작업실에서 24일 만난 음악가 전상규 씨는 “15년간 교촌치킨, 에쓰오일, 삼성전자, SPC, 빙그레 등 다양한 광고 음악을 만든 경험도 응원가 즉석 작곡에 도움이 됐다. 요즘 미국 야구 팬들의 메시지가 쏟아져 들어온다”며 웃었다.
양회성기자 yohan@donga.com
야구 팬 전상규 씨(48)의 2020년은 기적적이다. 인생에는 기쁨과 슬픔이, 승과 패가 공존함을 가르쳐준 야구와 음악이 요즘 그의 일상을 ‘홈런더비’로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며칠 전 미국 ‘워싱턴 포스트’ 기자에게 인터뷰 제안 e메일이 왔을 때, 전 씨는 피싱 사기일 거라 확신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5월 초, 미국 스포츠 채널 ESPN에서 출연 요청 메일이 왔을 때 그랬듯….

24일 만난 전 씨는 “주변 사람들도 메일 본문 아래 링크는 절대 누르지 말라”고 조언했다며 웃었다.

록 밴드 ‘와이낫’ ‘타틀즈’의 리더이자 인기 야구 팟캐스트 ‘야잘잘’의 진행자인 전 씨가 미국에 ‘진출’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코로나19의 여파로 메이저리그 개막이 미뤄졌다. ESPN이 한국프로야구(KBO) 생중계를 시작했다. 전 씨는 5월 초, 영어로 KBO와 LG트윈스를 소개하는 짧은 영상을 ‘야잘잘’ 유튜브 채널에 올렸다. 이를 본 ESPN 제작진이 연락해왔다. 사기일 거라 생각한 전 씨가 e메일 답장을 하지 않자 여러 경로로 전 씨에게 거듭 출연을 요청했다.

“첫 출연은 5월 20일 한화 대 LG 경기였어요. 딱 5분 출연하기로 했는데 막상 생방송에서 빵빵 터지니까 PD가 ‘좀만 더, 좀만 더’ 하더니 1시간을 풀로 내보냈죠.”

전 씨는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작업실 컴퓨터 앞에 통기타를 들고 앉았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화상 생중계. 야구경기 시작 시간은 한국 기준 오후 6시 반, 현지 기준 오전 5시 반. 졸음을 참고 화상중계 시스템을 켠 ESPN의 간판 캐스터 칼 래비치, 해설자 에드 페레즈가 전 씨의 미국식 개그와 즉석 작곡에 뒤로 넘어갔다.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피클스’가 구단 트위터에 올린 그림. 포틀랜드 피클스 트위터 캡처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피클스’가 구단 트위터에 올린 그림. 포틀랜드 피클스 트위터 캡처
이달 17일, 또 출연했다. 이번에도 5분 출연 약속이 1시간 출연으로 연장. 이번엔 래비치와 페레즈의 로고송을 즉석에서 통기타로 작곡해줬다. 만루 위기 상황에서 페레즈가 “주자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낮게 던져야…”를 연호하자 ‘Keep the Ball Down’이란 곡을 앉은 자리에서 뚝딱 만들어 불러줬다. 트위터에서 인기를 얻었다. 미국 야구팬들 사이에 그는 이제 유명인이다.

“20대 때 2년 반 정도 미국에 살았어요. 필라델피아에서 유학(필라델피아 템플대학 영상인류학 석사과정)을 하다 로스앤젤레스로 넘어가 녹음 엔지니어 과정을 수강하며 현지인들과 섞여 놀았죠. 그때 경험이 도움이 될 줄이야….”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한 전 씨는 ESPN에서 동양의 역사적 배경을 담은 설명도 했다. 그는 “LG트윈스의 전신이 MBC청룡인데 여기서 용은 ‘왕좌의 게임’ 시리즈에 나오는 당신네들(서구식) 용과 좀 다르다, 한국의 용은 불을 뿜지 않고 날개도 없으며 문화적으로 신성시된다는 식으로 해설해줬다”고 전했다.

“한국의 야구 응원 문화도 소개하고 응원곡도 불러줬어요. ‘우린 핫도그 안 먹어. 치맥 먹어’ 하니 재밌어 하더군요.”

화제 속에 전 씨는 얼마 전, 미국 대선 후보 로고송 작곡가도 됐다. 오리건주 독립구단 ‘포틀랜드 피클즈’의 마스코트인 ‘딜런 티 피클’이 재미삼아 대선 출마를 선언했는데 구단 측에서 ESPN을 보고 전 씨에 로고송을 의뢰한 것.

전 씨는 1982년 다시 태어났다.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 이종도의 10회 말 끝내기 만루홈런이 그의 심장을 비틀스보다 먼저 강타했다. 대학에서는 연고전 통합 상쇠로 뽑힐 정도로 꽹과리에 미쳐 살았다. 1998년 록 밴드 ‘와이낫’을 결성하고 비틀스 헌정 밴드인 ‘타틀즈’에서는 ‘전 레넌’으로 활약했다. 2006년부터 10년간 마포구 라이브 클럽 ‘타’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음악은 일이자 직업이고, 야구는 친구 같은 취미예요. 뭐가 더 좋냐는 질문은 ‘엄마가 좋냐, 아내가 좋냐’ 수준이죠.”

피클스 구단은 트위터에 ‘피클스가 LG 트윈스를 사랑하는 10가지 이유’란 게시물을 올리며 첫째를 ‘전상규가 LG 팬이므로’로 꼽았다.

“요즘 ESPN에서 제게 ‘영어 되고 특정구단의 팬이면서 재미있는 사람, 너 말고 또 없냐’고 닦달해요. 이젠 절 무슨 흥신소 직원으로 아는 건지….”

전 씨를 당분간 이 상황을 그저 즐기려 한다.

“워싱턴 포스트 기자가 저의 배경부터 한국의 코로나19 상황, 감염병 속 스포츠의 미래까지 다양한 질문을 던지더군요. KBO와 LG트윈스를 알리는 민간 홍보대사 역할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음악과 야구가 결합된 앨범을 하나 만드는 것도 그의 목표다.

“그동안 썼던 응원가들, ESPN 즉석 작곡을 모으고 신곡도 덧붙여볼까 해요. 팬들의 함성소리도 넣고요. 함성의 대한 갈증. 그건 야구장에 못 가는 선수와 팬 모두 지금 정말 절실하지 않나요?”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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