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분간의 무제… 난해한 연주에도 아이돌급 인기 여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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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록밴드 ‘레드 제플린’ 베이시스트… 존 폴 존스의 첫 내한 공연 화제
클래식 첼리스트 카르투넨과 협연… 피아노-전자장비 오가며 즉흥연주

2일 서울 성동구의 첫 내한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존 폴 존스(왼쪽)와 첼리스트 안시 카르투넨. 워너뮤직코리아 제공
2일 서울 성동구의 첫 내한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존 폴 존스(왼쪽)와 첼리스트 안시 카르투넨. 워너뮤직코리아 제공
“더는 못 듣겠다. 나 먼저 나갈게.”

2일 오후 7시 50분 서울 성동구 아차산로의 복합문화공간 ‘플레이스비브’. 1부 공연이 끝나자 한 클래식 마니아가 ‘유언’을 남기더니 가방을 챙겨 사라져버렸다. 객석 다른 곳에서도 깊은 한숨, 허탈한 웃음이 교차했다.

영국의 전설적 록 밴드 레드 제플린 멤버의 첫 내한은 이렇듯 호락호락한 엔터테인먼트가 아니었다. ‘Stairway to Heaven’도, ‘Rock and Roll’도 없었다. 제플린의 전 베이시스트 존 폴 존스(73)는 이날 핀란드 클래식 첼리스트 안시 카르투넨과 새로 결성한 ‘선스 오브 치폴레’ 멤버로 한국에 첫선을 보였다. 카이야 사리아호 같은 북유럽의 진보적 음악가들과 주로 작업한 카르투넨이 평생 록 연주자로 산 존스와 과연 어떤 음악을 만들어낼까. 7시 공연 시작 전까지 누구도 답을 낼 수 없었다. 이들은 초(超)실험적 공연을 선사하며 모든 기대와 상상을 산산조각 냈다.

존스와 카르투넨은 공연장 내부의 나선계단으로 내려와 등장했다. 객석에서는 1분 넘게 환호와 갈채가 쏟아졌다. 록의 성경, 제플린의 영광이 현현했다는 데 감동한 관객들의 경의.

그러나 공연 내용은, 적어도 친절성 면에서는 천국이 아닌 지옥으로 가는 계단이었다. 짧은 인사 이후 시작한 제목도 없는 도입 곡은 20분짜리 자유 즉흥연주.

90분간 단 네 곡이었다. 하나같이 무제(無題)와 무조(無調)의 즉흥연주. 존스는 맬릿으로 피아노 현을 두드리거나 만돌린을 빠른 트레몰로로 연주했고, 카르투넨은 활과 첼로 현의 마찰력을 극대화해 배음(倍音)을 쏟아냈다. 아이패드나 이펙터 페달을 사용해 왜곡한 음향은 비행기가 이륙하거나 쇠구슬이 쏟아지는 굉음이 돼 공연장을 메웠다. 불길한 소음을 지속하는 ‘다크 앰비언트’ 장르에 가까웠다. 비틀스의 신묘한 대곡 ‘Revolution 9’을 실황으로 듣는 듯도 했다.

내용은 난해했지만 반응만은 아이돌 콘서트였다. 80여 명의 관객 다수는 뜨거운 환호로 존스와 카르투넨을 환송했다. 공연 뒤 20여 명의 관객은 공연장 입구에 30분 넘게 진을 쳤다. 존스는 숙소행 차량에 오르기 전, 열린 차문 앞에 엉거주춤 서서 예정에도 없던 즉석 사인회를 열어야 했다. ‘Stairway…’가 실린 레드 제플린 4집 CD와 LP를 들이미는 손목들의 해일에 일일이 화답하는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일견 불친절해 보이는 공연을 깍듯한 예의로 마무리한 존스는 옛 명성과 명곡의 깃발을 휘날려 환대를 사는 대신 치열한 현역임을 가장 실험적인 방식으로 증명하고 떠났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레드 제플린#존 폴 존스#존스 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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