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사람들] 뭉개진 손으로 바다를 메우다

  • 스포츠동아
  • 입력 2016년 5월 17일 05시 45분


전남 고흥군 도덕면 오마간척 한센인 추모공원에서 바라본 간척지. 왼편에서 밀려들고 빠져나가는 바닷물은 방조제에 막혔다. 오른쪽 너른 평야는 불운한 병을 딛고 일어서려던 소록도 사람들의 꿈이었다. 섬사람들은 삽과 곡괭이 그리고 짓무른 손과 발로 또 다른 섬을 허물어 흙을 퍼 나르고 바다를 메웠다. 소록도(고흥)|김종원 기자 won@donga.com
전남 고흥군 도덕면 오마간척 한센인 추모공원에서 바라본 간척지. 왼편에서 밀려들고 빠져나가는 바닷물은 방조제에 막혔다. 오른쪽 너른 평야는 불운한 병을 딛고 일어서려던 소록도 사람들의 꿈이었다. 섬사람들은 삽과 곡괭이 그리고 짓무른 손과 발로 또 다른 섬을 허물어 흙을 퍼 나르고 바다를 메웠다. 소록도(고흥)|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3. 오마도 이야기

누구는 ‘천형의 땅’이라고 했다. 또 누구는 ‘아픔의 섬’이라고 말한다. 천형처럼 내려앉은 아픔과 설움의 흔적이 여전하기 때문일까.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 마치 “어린 사슴의 모양을 닮아”(小鹿島, ‘소록도 80년사’·국립소록도병원 펴냄) 붙여진 이름은 그러나 한센병과 그 후유증 혹은 합병증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문둥병’이란 이름의 소외와 차별, 멸시의 아픔을 감당해낸 섬 사람들을 위로하지 못하는 듯하다. 1916년 일제가 나환자 격리 정책에 따라 이 곳에 자혜의원을 세운 지 100년. 소록도엔 여전히 그 오랜 세월이 남긴 상처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섬 사람들의 이야기를 네 차례에 걸쳐 싣는다.


농사 짓고 산다는 희망으로 하루하루 견뎌
남편이 간척일 하고 가져온 건 군용담요뿐
메워진 땅엔 바깥사람들이 들어와 살더라


“…. 이제 경기는 끝났습니다. 여러분에겐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이지만, 문둥이에겐 이제부터 시작인 것입니다. 문둥이도 축구 같은 걸 할 수 있구나 하는 조그마한 사연이 수만 나환자에게는 벅차고 갈피 잡을 수 없는 희망으로 받아들여지며, 그것이 그렇게 받아들여진 후에 일어날 그 벅찬 일들을 여러분은 상상할 수가 없을 겁니다.….”(이청준, ‘당신들의 천국’-이규태의 ‘소록도의 반란’(사상계 1966년 10월호) 일부 인용)

1961년 8월 국립소록도병원장으로 부임한 육군 대령 조창원은 이듬해 2월 섬사람들로 구성된 축구팀을 꾸렸다. 외부에서 코치를 초빙해 훈련했고 팀은 그해 10월 전국체전에 전남 대표로 출전했다. 그 사이 섬 바깥 팀과 벌인 경기를 끝낸 뒤 조 원장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관중에게 이처럼 말했다.

조 원장은 축구팀을 조직해 ‘장로교’(기독교)와 천주교팀으로 나눠 경기를 펼치게 하며 섬사람들의 신심을 자극했다. 김상범(가명·70)씨는 “날마다 경기를 했다”면서 “남북대결보다 더 무서울 정도로 종교적으로 대립했다”고 말했다.

그런 속에서도 섬사람들은 “벅찬 일”로부터 또 다른 힘을 얻었다. 그리고 “벅찬 일”에 뛰어들었다.

● 정착의 꿈

1962년 봄, 당시 손문경 의원은 조창원 원장에게 “환자들의 자활 정착사업에 도움이 되고 고흥지역 발전에도 이바지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말했다.(국립소록도병원, ‘소록도 80년사’) 한센병 치유자들의 사회 복귀를 위한 정부 차원의 정착사업이 추진 중인 상황이기도 했다. 종교간 대립 속에 치열했던 축구의 열기가 뿜어낸 “단결력”(위 인용)도 힘을 보탰다.

바닷물을 막고 땅을 일구자는 거였다. “바다를 막아 그들의 내일 앞에 어두운 납골당의 절망 대신 꿈에 부푼 들판을 마련해 주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향을 잃고 육지에서 쫓겨난 이들에게 새로운 고향과 새로운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주자”는 것이었다.(‘당신들의 천국’)

대규모 간척사업은 그해 7월 첫 삽을 떴다. 오마도 간척사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불운한 병의 후유증으로 온전하지 못한 육신들이었지만 오로지 그 희망만을 간직한 2000여명의 섬사람들이 바다를 향해 차례로 나아갔다. “새로운 고향과 생활의 터전”, 991만7300여㎡(300만평) 너른 땅의 희망만이 존재했다. 희망은 이들이 모멸과 차별과 멸시 속에 갇혀 지내야 했던 땅, 소록도의 두 배에 해당했다.

풍남반도와 오동도를 잇는 제1방조제로부터 제3방조제까지 간만의 차가 크고 수심 깊은 물살을 이겨내야 하는, 언제 마무리될지도 모를 공사였다. 그래도 섬사람들은 인근 백석리 뒷산과 무인도인 만제도를 헐어내어 얻은 흙과 바위를 바다 속에 끝도 없이 밀어 넣기 시작했다.

1. 섬사람들은 배고픔과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탈출을 꿈꾸다 감금실에 갇혔다. 인권은 없었다. 2. 17일은 자혜의원이 문을 연 지 꼭 100년을 맞는 날이다. 3. 일제강점기 섬사람들은 벽돌공장에서 강제노역했다. 그 굴뚝 터에 십자가가 서 있다. 4. 오마도 간척사업에 참여한 국제워크캠프단이 세운 구라탑. 소록도 중앙공원에 우뚝 서서 ‘나병은 낫는다’고 말한다. 5. 섬사람들은 유해가 되어 만령당에 눕는다. 1만이 넘는 유해가 잠들어 있다. 소록도(고흥)|김종원 기자 won@donga.com
1. 섬사람들은 배고픔과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탈출을 꿈꾸다 감금실에 갇혔다. 인권은 없었다. 2. 17일은 자혜의원이 문을 연 지 꼭 100년을 맞는 날이다. 3. 일제강점기 섬사람들은 벽돌공장에서 강제노역했다. 그 굴뚝 터에 십자가가 서 있다. 4. 오마도 간척사업에 참여한 국제워크캠프단이 세운 구라탑. 소록도 중앙공원에 우뚝 서서 ‘나병은 낫는다’고 말한다. 5. 섬사람들은 유해가 되어 만령당에 눕는다. 1만이 넘는 유해가 잠들어 있다. 소록도(고흥)|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깨어지고, 부서져도…

20대 중반에 섬사람이 된 최금주(77, 고흥군 도양읍) 녹생리 서기는 당시 100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공사를 위한 막사에서 먹고 자고 일했다.

“겨울이면 막사 한가운데 연탄난로를 두 개 피워놓고 100여명이 숙식을 했다. 이불이라고는 얇은 군용담요가 전부였다.”

마치 군 내무반처럼 목조 판자를 눕혀 놓은 막사 안에서 행여 연탄불이라도 꺼뜨릴까 당번을 번갈을 섰다. 그래도 추위와 더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무런 장비도 없이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만 흙을 퍼서 날랐다. 두 사람이 한 토차에 흙을 잔뜩 실어 밀고 나아가는 험난한 노동이었다”는 최 서기는 “그래도 땅이 생긴다 하니 괴로운 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매일 오전 7시가 채 못돼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막사 주변 꾸려진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뒤 오전 공사에 투입됐다. 12시 점심, 그리고 다시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꼬박 흙을 파내고 바위를 옮겨 바다에 퍼부었다. 그나마도 밥과 반찬은 많아서 섬 안에서 견뎌내야 했던 배고픔은 덜했다.

1963년 12월 고흥반도로 이어지던 바다는 어느새 흙과 바위로 기적처럼 메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닷물은 흐르고 또 넘쳤다. 거센 바람과 바닷물은 방조제를 삼켰고 메워진 흙을 떠밀어 보냈다. 그 사이 어떤 이는 흙더미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또 어떤 이들은 이미 짓뭉개진 손과 발로 흙을 퍼 나르다 손가락이 떨어져나가고 발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인간 노동은 자연 앞에 무기력했지만, 섬사람들의 무력함은 그것보다 더 헛됐다.

무참한 노동이었지만 그래도 “온전한 농사를 짓고 살 수 있다는 희망” 하나만으로도 견뎌낼 수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험난한 노동의 대가는 하루 30원의 임금 전표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방조제의 침강과 함께 그들의 것이 되지 못했다. 장경희(가명·78) 할머니는 “오마도에서 돌아온 남편이 가져온 것은 돈이 아니라 군용담요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땅은 없었다

절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더 높은 절벽 앞에 섬사람들은 놓여졌다.

때마침 다가온 총선거는 인근 주민들의 반발을 무시하지 못했다. 섬사람들에게 땅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는 반대의 목소리에 정치는 눈치를 살폈고 더 많은 표를 포기하지 못했다.

희망은 한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바다를 메우려 바다에 나선 지 정확히 3년 하고도 보름째 되던 날. 메워진 땅과 앞으로 메워야 할 희망은 사라졌다. 간척사업의 주체는 전라남도가 되었다.

“간척사업이 얼마나 진척됐는지 평가를 하는데 우리는 80% 공정을 이뤘다 했다. 하지만 당국은 60%로 저평가했다. 바닷물을 막아 그 안에 흙을 깔고 잔디만 심으면 되는 순간이었다.”

소록도 주민자치회 강선봉(77) 감사는 말했다.

그리고 섬사람들은 밀려났다. 온전하지 못한 육신에, 온전하지 못했던 세상은 견디기 힘겨운 또 하나의 고통과 차별과 모멸을 안겨주고 말았다.

1988년 마침내 완전히 메워진 땅에서는 이제 섬 바깥 사람들이 농사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30일자에 계속됩니다.>

※ 2월23일자부터 격주로 연재 중인 ‘고흥군과 함께하는 이야기가 있는 마을’은 5월 한 달 동안 ‘소록도, 사람들’ 4회 연재로 대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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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고흥) |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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