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돈나푸가타 와이너리의 안토니오 랄로 사장이 서울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고급 와인인 ‘밀레 에 우나 노테’를 들고 웃고 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시칠리아를 보지 않고서는 이탈리아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에서 썼듯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의 발부리 끝에 놓여 있는 시칠리아는 매력적인 섬이다. 시칠리아는 풍부한 일조량과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 덕분에 레몬, 포도 등 갖가지 과일이 탐스럽게 영글고 당도도 다른 지역보다 높다. 천혜의 자연 환경을 지닌 이곳 포도로 만드는 와인은 어떤 맛일까. 시칠리아에서 1851년부터 164년 동안 와인을 빚어온 돈나푸가타 와이너리의 사장 안토니오 랄로 씨(48)를 만나봤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콘테사 엔텔리나에 있는 돈나푸가타 와이너리. 면적 270만㎡로 시칠리아에서 가장 넓은 포도밭 중 한 곳으로 꼽힌다. 나라셀라 제공 포도는 내 운명
집안 대대로 와인 농사를 지어 온 랄로 씨에게 포도밭은 어린 시절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세 살 때부터 포도밭에서 뛰어논 랄로 씨에게 포도밭은 삶의 방식을 가르쳐 준 스승과 같았다. 학교 숙제도 양조장에서 앉아서 할 정도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직접 숙제 검사를 해 손자가 제대로 숙제를 마쳤을 경우에만 포도밭과 양조장에서 뛰놀게 했다. 랄로 씨가 본격적으로 양조 작업에 참여해 포도 수확에서부터 착즙, 발효까지의 전 제조 과정에 참여한 것은 15세부터였다. 랄로 씨는 “어릴 때부터 포도밭에서 열매를 따고 술을 만드는 과정이 가장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와인 유전자를 타고난 그는 대학도 시칠리아 팔레르모에 있는 농과대학에 진학해 와인을 공부했다.
이탈리아, 그것도 시칠리아란 섬에서 자란 그에게 와인에 대한 시각을 넓혀 준 것은 대학 졸업 후 근무하게 된 독일 와인 수입업체에서의 경험이었다. 왜 많은 나라 중 독일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랄로 씨는 “독일은 그 당시 이탈리아 와인 중에서도 시칠리아 고급 와인을 많이 수입하는 국가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당시 독일은 이탈리아 와인뿐 아니라 프랑스 미국 칠레로부터 다양한 와인을 수입하고 있었다. 랄로 씨는 와인 수입업체에 근무하면서 세계의 다양한 와인을 접하고 각국의 와인 판매자와 소비자를 두루 만났다. 프랑스 보르도의 와인 생산자와 미국 내파밸리의 와인 판매상들을 만난 것도 그 시기였다. 그는 “독일에서의 경험이 와인에 대한 시각을 넓혀줬다”며 “결국 뛰어난 와인을 많이 마셔보고 접해본 사람이 그것보다 더 뛰어난 와인을 만들 수 있는 법이다”라고 강조했다.
1992년 다시 시칠리아로 돌아온 그는 이탈리아 최고의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가문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농경방식에 최신 방식을 접목했다. 예를 들어 포도밭을 구획별로 나누고 각 구획에서 생산되는 포도를 분류해 각기 다른 품질의 와인을 생산했다. 그는 이러한 미세 양조 방식뿐 아니라 저명한 와인 생산자인 자코모 타키스 씨를 영입해 와인 제조 방식을 한층 업그레이드했다. 수년간의 노력 끝에 신구의 조화가 이뤄진 고급 와인 ‘밀레 에 우나 노테(1001일의 밤)’가 1997년 처음 세상에 나왔다.
밀레 에 우나 노테
앙겔리
리게아
셰라자데
스토리가 있는 와인
‘여성, 기사, 무기, 사랑.’
랄로 씨의 돈나푸가타 와이너리에서 생산되는 와인 중 ‘앙겔리’ 라벨에 이탈리아어로 쓰여 있는 글귀다. 이 문구는 이탈리아의 시인 아리오스토가 1532년 펴낸 영웅 서사시 ‘광란의 오를란도’에 나오는 것. 와인 이름인 앙겔리는 오를란도의 연인 안젤리카에서 따왔다. 이처럼 랄로 씨의 와인은 병마다 특색 있는 그림과 주인공,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스토리로 소비자를 유혹한다.
와이너리의 명칭인 ‘돈나푸가타’에도 옛 얘기가 버무려져 있다. 이탈리아어로 ‘피난처의 여인’을 뜻하는 돈나푸가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공국의 여제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아 카롤리나를 뜻한다. 나폴리 왕이었던 페르디난도 4세의 아내 카롤리나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피해 시칠리아로 피난을 가 현재 돈나푸가타 와이너리가 있는 성에서 머물렀다. 주민들은 왕비를 두고 ‘피난처의 여인’, ‘도망친 여인’이라 불렀고 그곳의 지명 자체가 돈나푸가타가 된 것이다. 이후 랄로 씨의 1대 할아버지가 이곳 땅을 사면서 와이너리 이름도 돈나푸가타로 지은 것이다. 돈나푸가타 와인 라벨에 그려져 있는 여인은 카롤리나를 상징한 것이며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는 도망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급 와인인 밀레 에 우나 노테에 그려져 있는 궁전은 카롤리나 왕비의 궁전을 표현한 것이다. 와인 이름인 ‘1001일의 밤’은 페르시아의 설화인 ‘천일야화’처럼 질리지 않고 계속 즐기며 마실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각각의 스토리를 담은 와인의 라벨은 랄로 씨의 어머니인 가브리엘라 랄로 여사가 직접 제작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디자인을 전공한 적인 없는 랄로 여사가 이처럼 멋진 라벨을 만드는 비법에 대해 물어봤다.
“아마 시칠리아란 섬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문화적 유산 속에서 자란 배경이 작용한 것이겠지요. 지중해의 따뜻한 햇살을 연상시키는 시칠리아 특유의 밝은색과 창의적인 발상은 시칠리아인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 같습니다.”
랄로 씨는 시칠리아를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라고 표현했다. 오래전부터 스페인, 아랍, 오스트리아 등 다양한 민족이 시칠리아를 지배하고 거주하면서 특유의 복합적 문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의 프라다로 대표되는 깔끔하고 도회적인 느낌의 패션과 달리 밝고 정열적인 색상을 표현하는 패션 브랜드 돌체앤가바나의 도메니코 돌체도 이곳 시칠리아 출신이다. 랄로 씨는 “포도가 자라기 좋은 천혜의 자연환경과 시칠리아의 문화가 결합한 와인이 바로 돈나푸가타의 와인들이다”라고 밝혔다.
좋은 와인을 위한 노력은 아직도 진행 중
랄로 씨는 지금도 시칠리아 섬 곳곳을 누비며 새로운 포도 품종 찾기에 바쁘다. 그는 “더 좋은 맛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섬을 뒤지다 보니 이미 30여 종의 새로운 포도를 찾았고 그중 4종은 고급 와인으로 만들기 적합했다”고 밝혔다. 집안 대대로 그 자신도 어려서부터 와인과 함께 자란 그에게 와인은 과연 무엇일까.
“제게 와인은 한마디로 ‘행복’입니다. 저는 와인을 제조하면서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없이 행복한 인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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