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410>울울창창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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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울창창 ―한세정(1978∼ )

기다려라
관통할 것이다
나를 향해
나는 전진하고
나를 딛고
나는 뻗어나갈 것이다

손이 없으면
이마로 돌격하리라
절망이 뺨을 후려칠 때마다
초록의 힘으로
나는 더욱 무성하게
뿌리 내릴 것이다

기다려라
압도할 것이다
절망 위에 절망을 얹어
내가 절망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때까지

초록의 목덜미가
선연한 핏줄로 붉어질 때까지
나는 이파리를 움켜쥐고
또 다른 이파리를 향해
울울창창(鬱鬱蒼蒼)
온몸으로 나를
흔들어댈 것이다

‘기다려라/관통할 것이다’, 나무의 목소리를 빌려 화자는 의지를 표명한다. 나무의 관통은 수직으로 이행된다. 나무처럼 뿌리에서 우듬지까지 꿰뚫고 하늘을 향해 뻗치는 기세로 살아가리라는 이 수직 상승의 의지! ‘나를 향해/나는 전진하고/나를 딛고/나는 뻗어나갈 것이다’, ‘나’, ‘나’, ‘나’! 뿌리 내린 자리에서 평생을 보내는 대개의 식물같이 ‘나’라는 뿌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초록의 힘으로’ ‘더욱 무성하게/뿌리’ 내리려는, ‘나의 생’에 대한 옹골찬 지향이 인간이라는 동물의 특징이겠다. 그런데 살아가노라면 그 인간 고유의 자존(自存) 감각과 생명력을 꺼뜨리는, ‘절망이 뺨을 후려칠 때’가 언제 어디에서라도 생길 수 있다. ‘손이 없으면/이마로 돌격하리라’, ‘절망 위에 절망을 얹어’ 등의 언표만으로도 현재 화자의 심정이나 처한 상황이 절망에 압도당할 지경으로 팍팍하다는 게 짐작된다. 하지만 삶아, 네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익히 알지만, 나 또한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야! 조용히 시들어 버리고 사그라질 내가 아니야.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한다지? 그래, 온몸으로, 온몸으로 맞받아치리라. 한파로도 가뭄으로도 뿌리가 옹골차지는 나무처럼, 어떤 절망도 내 ‘초록 힘’을 키우는 밑거름으로 만들리라. ‘나는 더욱 무성하게/뿌리 내릴 것이다’! 화자는 자신에게 ‘기다려라’ 속삭이며 기를 살린다. ‘기다려라, 압도할 것이다’, 능히 절망을 절망시킬 것 같은 화자의 기세다. 내 결코 생이파리인 채 지지 않으리. ‘초록의 목덜미가/선연한 핏줄로 붉어질 때까지’, 내게 주어진 생명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태우리! 우리도 울울창창 숲에 가서 화자처럼 무럭무럭 김 오르는 초록 피를 수혈받고 힘을 냅시다!

황인숙 시인
#울울창창#한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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