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트렌드]딴따단 따따단∼ 직장 스트레스 녹이는 피아노맨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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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남자들

피아노 치는 세 남자, 오국환 박수환 이경재 씨(왼쪽부터)가 6일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 ‘피아노 리브레’가 운영하는 카페의 그랜드피아노 앞에 모였다. 학원과 같은 건물에 있는 이 카페는 수강생들의 쉼터이자 연주회 공간으로 쓰일 예정이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피아노 치는 세 남자, 오국환 박수환 이경재 씨(왼쪽부터)가 6일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 ‘피아노 리브레’가 운영하는 카페의 그랜드피아노 앞에 모였다. 학원과 같은 건물에 있는 이 카페는 수강생들의 쉼터이자 연주회 공간으로 쓰일 예정이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비장한 표정을 한 두 남자가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았다. 표정에는 언뜻 자신감도 엿보인다. 구경꾼들은 숨죽인 채 두 남자의 손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의 손이 건반 위에서 움직였다. 피아노 해머가 현을 때리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연주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 순간 두 남자의 속주 대결은 멋진 화음을 낳는 합주가 된다.

2007년 개봉한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는 음악 학교로 전학 온 주인공과 ‘피아노 왕자’라고 불리던 학교 선배 간의 자존심이 걸린 피아노 대결이 그려진다. 피아노 치는 남자를 가장 열정적으로 표현한 영화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이처럼 영화에서나 멋지게 비치는 피아노 치는 남자들이 현실에서는 어떤 사람들일지 궁금했다. 이들을 만나러 2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성인 피아노 전문학원 ‘피아노 리브레’를 찾았다.

학원 문을 열자마자 여느 피아노 학원과 다른 풍경에 반사적으로 간판을 확인했다. 8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널찍한 가죽 소파와 한쪽에 마련된 커피와 다과들, 적당히 어두운 조명까지. 한껏 멋을 낸 인테리어가 고급 술집을 연상시켰다. 중앙에 마련된 그랜드피아노에서는 라이브 연주가 시작될 것 같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피아노 소리를 듣고서야 ‘제대로 찾아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카페 같은 학원, 수강생 절반이 성인 남자

“수강생 절반 이상이 남자 분들이에요. 20대 대학생부터 70대까지 연령도 다양합니다. 78세 할아버님이 최고령 수강생이신데 ‘도레미만 눌러도 행복하다’고 하실 만큼 열정적이세요.”

3년 전 피아노 리브레를 차린 김의영 원장(29)은 남자 수강생들의 스토리를 줄줄이 소개했다. 이곳은 취미로 피아노를 배우는 성인들만 받는 특이한 학원이다. 인테리어도 특별했다. 김 원장은 일반 학원과 달리 카페처럼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염두에 뒀다고 했다. 최소 연습실 3, 4개는 만들 수 있는 공간을 오로지 휴식 공간으로 비워 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학원 이름도 ‘휴식’을 뜻하는 스페인어 리브레에서 따왔어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김 원장은 3년 전 유학을 포기하고 피아노 학원을 차렸다. 대학 시절 7년 동안 성인을 대상으로 피아노 레슨을 하면서 쌓은 노하우를 살리고 싶었다. 바이엘에서 체르니로 이어지는 정규 과정 대신 각자 좋아하는 곡을 쉽게 편곡해 가르치는 레슨 방식이 금세 입소문을 타면서 문의가 끊이질 않았다. 피아노를 취미로 배우려는 성인이 많다는 확신이 들었다. 무엇보다 적성에도 잘 맞았다. 2012년 3월 강남점을 시작으로 김 원장이 차린 학원은 3년 만에 6곳으로 늘었다.

연휴 기간이라 텅 비어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20개의 연습실 가운데 10곳이 차 있었다. 이 가운데 7명이 남자였다.

영화 같은 피아노와의 첫 만남

이날 만난 5년 차 소프트웨어 개발자인 박수환 씨(31)는 이 학원의 첫 번째 수강생이다. 김 원장의 개인 레슨을 받은 게 인연이었다. 2012년 3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퇴근 후 학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주말에는 오전부터 학원이 문 닫을 때까지 머문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이 ‘퇴근하고 학원에 가는 게 피곤하지 않으냐’고 물어봐요. 하지만 제게 피아노는 일이 아니라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거든요. 피아노와 친한 사람들이 있는 학원이 집보다 편할 정도니까요.”

박 씨가 피아노를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때만 해도 그는 악보를 보는 법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음악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틀어준 음악 영화 한 편이 그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천재 피아니스트의 좌절과 재기를 그린 ‘샤인’이 바로 그 영화였다.

“주인공이 미친 듯이 에너지를 쏟아내면서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는 장면을 보고 한순간에 사로잡혔죠. 그래서 수능 시험이 끝난 다음 날 바로 피아노 학원으로 달려갔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피아노를 치는 이들도 있었다. 한의사인 오국환 씨(29)는 3년 전 실연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11년 만에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오 씨는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던 어머니 덕분에 중학교 때까지 피아노를 배웠다. 남자치고는 오랫동안 피아노를 배운 편이지만 이미 손이 굳어 버린 지 오래였다.

“헤어지던 날 한 시간가량 비를 맞았는데 그때 불현듯 피아니스트 이루마 씨의 ‘키스 더 레인’이 떠올랐어요. 악보 계명을 일일이 적고 연주하려고 했지만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더라고요. 그날로 학원에 등록했죠.”

재단법인에서 근무하는 이경재 씨(42)가 3년 전 피아노를 시작한 계기는 두 살 터울 누나의 죽음이었다.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는 걸 실감했어요. 지난 삶을 되돌아보니 그동안 미래를 준비하는 데에만 너무 몰두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을 즐겁고 충실하게 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더라고요. 고민 끝에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배우기로 했어요.”

피아노 배우고 삶이 풍성해졌다

각기 이유는 달랐지만 세 남자는 피아노를 치면서 달라진 점에 대해 “삶이 풍성해졌다”고 입을 모았다. 퇴근 후 TV를 보는 게 유일한 여가생활이었던 이 씨는 피아노를 시작한 뒤로 TV를 보는 시간에 피아노를 연습하고 있다.

“일을 하다 보면 이성적으로 행동할 때가 많잖아요. 하지만 피아노 치는 순간만큼은 제 감정에 솔직해지거든요. 거기서 자유를 느끼는 것 같아요.”

그는 이전부터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들었다고 했지만 “듣는 거랑 직접 치는 건 차원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오 씨 역시 피아노를 치다 보면 하루 스트레스가 모두 풀린다고 했다. 그는 “하루 종일 환자들을 상대하고 나면 심적으로 지칠 때가 있다”며 “피아노에 모든 감정을 쏟고 나면 다시 활력이 생긴다”고 말했다.

이들이 피아노 예찬론을 펴는 데에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악기의 제왕으로 불리는 피아노는 그 크기만큼이나 풍부한 표현이 가능하다. 파이프오르간을 제외하면 가장 넓은 음역대를 소화할 수 있는 악기다. 88개 건반이 내는 가장 낮은 음이 27.5Hz, 가장 높은 음은 4186Hz로 사람이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음역대를 모두 표현할 수 있다. 또 피아노의 정식 명칭이 여리게 연주한다는 뜻의 ‘피아노’와 세게 연주한다는 뜻을 가진 ‘포르테’가 합쳐진 ‘피아노포르테’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건반을 누르는 세기를 조절해 어떤 악기보다 세밀한 표현이 가능하다.

박 씨는 피아노 덕분에 성격까지 달라졌다고 했다. 그는 성인이 된 후에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할 정도로 소극적이라 사람을 사귀는 데 서툴렀다고 털어놨다.

“전역한 뒤 처음으로 피아노 동호회에서 주최한 연주회 무대에 섰을 때 손과 발이 덜덜 떨려서 피아노를 제대로 치기 힘들 정도였거든요.”

이랬던 박 씨는 지난해 독주회에 이어 올 2월에는 학원에서 만나 친해진 지인 6명과 함께 ‘PM7(Piano Man 7·피아노 치는 남자들 7명)’이라는 모임을 결성해 따로 연주회를 가졌다.

피아노로 꾸는 꿈

피아노에 빠져있는 남자들은 비단 이들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생긴 페이스북 페이지 ‘피아노 치는 남자들’에는 1년 만에 31만5000여 명이 가입했다. 운영자 정인서 씨는 “자신이 연주한 영상을 페이지에 올려달라는 문의가 하루 평균 50여 건 씩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피아노에 몰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대전에서 대학을 다닌 박 씨는 2009년 대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연주회에 참가했던 순간을 소개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 연주한 곡이 드뷔시의 ‘꿈’이었어요. 어려운 곡은 아니었지만 취업이라는 사회적인 꿈과 큰 무대에 서고 싶다는 꿈을 모두 이룬 제 상황이라 벅찬 감정으로 연주했거든요.”

그는 죽기 전에 전공자들도 어려워한다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무대 위에서 제대로 연주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이 곡은 영화 ‘샤인’ 주인공이 연주한 곡이기도 하다.

오 씨는 3개월 전 피아노 연주회 무대에 선 날의 감동이 피아노를 계속 치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박 씨와 함께 PM7 모임의 일원인 그는 올해 2월 생애 처음으로 연주회에 참가했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주회 연습에 몰두했죠. 의사 시험을 준비할 때 이후로 한 가지에 이렇게 몰입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 씨는 아이들과의 추억을 꼽았다. “제가 만약 피아노를 안 쳤다면 퇴근한 뒤에 여섯 살 난 딸, 세 살짜리 아들과 함께 TV를 봤겠죠. 아직 엉터리지만 아이들이 피아노를 가르쳐 달라고 할 때 정말 피아노를 잘 배웠다 싶어요. 올해 태어난 막내에게도 직접 피아노를 가르치고 싶어요.”

세 남자가 피아노를 시작한 계기와 각자 그리는 꿈은 달랐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남긴 말이 있다. “오늘을 즐겁게 만족하며 사는 게 중요하잖아요.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고 싶어요.”

이들의 충실한 삶을 응원하는 의미에서 마무리는 미국 피아니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인 빌리 조엘의 곡 ‘피아노 맨’ 후렴구로 대신한다.

“Sing us a song, you‘re the piano man.(노래를 불러주세요. 당신은 피아노 맨입니다.)”

▼“그 시간에 영어공부나 하지” 주변 시선은 아직도…▼

늘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피아노맨

피아노를 치는 남자들의 생활이 매순간 낭만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우선 일과 여가를 병행하기는 쉽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야근과 회식으로 시간을 빼기가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아직 한국 사회에서 취미로 피아노 치는 남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다지 곱지 않은 탓도 크다.

입사 5년 차 직장인 박수환 씨는 “주위에서 ‘영어 공부나 대학원 진학 등 업무와 관련된 분야에 투자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조언을 자주 듣는다”고 말했다. 한의사 오국환 씨 역시 이런 부담에서 자유롭지 않다.

“남들이 친구를 만나거나 TV를 보거나 게임을 할 시간에 저는 피아노를 치는 것뿐이지만 혹시라도 ‘피아노에 빠져 업무를 소홀히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까 업무에 더욱 신경을 씁니다.”

한창 일할 나이라고 하는 40대 직장인 이경재 씨가 느끼는 부담은 더욱 크다. 그는 “피아노를 배운 지 1년 정도 지나니까 지인 10명 중 8명은 ‘그만할 때가 된 것 아니냐’고 한다”며 “그럴 때마다 제 경력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닌지 고민이 된다”고 털어놨다.

어린 세 자녀를 둔 부모로서의 고충도 만만치 않다고 했다. 그는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니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건 더욱 어려워졌다. 가정과 일, 그리고 여가까지 모두 잘하는 게 쉽지는 않더라”고 말했다.

이들은 남자가 피아노를 치면 여성스럽게 비칠까 고민한 적이 있다고도 했다. 지금은 피아노에 푹 빠져 있는 박 씨도 “어릴 적 어머니 손에 이끌려 피아노학원을 잠깐 다닌 적이 있다”며 “여자 아이들이나 하는 악기라는 생각에 피아노를 배우는 게 싫어 금방 그만뒀다”고 말했다.

“색소폰을 남자가 불면 멋있다고 하지만 유독 피아노를 치는 남자는 여성스럽다는 인식이 강한 것 같아요.”

이 씨의 말처럼 한국에서 피아노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을 제외하면 피아노는 여자들이나 아이들이 치는 악기로 여겨질 때가 많다. 하지만 이들은 머지않아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박 씨는 굳이 악기에도 성별이 있다면 피아노는 남자의 악기라고 주장했다.

“피아노만큼 남자들에게 잘 어울리는 악기도 없을 겁니다. 에너지 소모가 엄청 많거든요. 유명한 피아니스트 대부분이 남자인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이 씨는 조금 다른 의미의 낙관론을 폈다.

“다들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지만 막상 그 시간이 주어지면 어떻게 쓸지 몰라 고민하더라고요. 저희 아버지나 남자 선배들을 봐도 등산, 골프 정도가 유일한 여가생활입니다. 하지만 여가를 다양하게 보내려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레 피아노 치는 남자도 늘어날 겁니다.”
김호경 기자 whalefish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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