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비밀 어찰에 대한 신하의 답장 최초 발굴
충청관찰사 박종악이 쓴 편지 105통… 아산만 일대 천주교 유포 실태 보고
“100호중 물들지 않은곳 겨우 20호”… 초기 한국 천주교史 사료 가치 높아
정조 16년(1791년) 12월 충청도관찰사 박종악이 정조에게 보낸 편지. ‘신(臣)이 천찰(天札)을 받으니…’ 같은 표현을 통해 이 편지가 군신 사이에 오간 글임을 알 수 있다(흰색상자 안).
정조가 신하들에게 보낸 비밀 ‘어찰(御札)’에 대한 신하의 답장이 최초로 발굴됐다. 정조가 노론 벽파의 수장이던 심환지를 비롯해 신료 10여 명에게 12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내며 ‘서찰정치’를 펼친 사실은 2009년 밝혀졌지만 신하가 정조에게 보낸 비밀 답신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문서첩 ‘수기’의 표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보관돼 있다.이번에 발굴된 정조 어찰에 대한 답장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소장한 ‘수기(隨記)’라는 문서첩에 수록돼 있다. 정조의 고모인 화평옹주의 시조카로 당시 충청도관찰사였던 박종악(朴宗岳·1735∼1795)이 1791년부터 죽기 직전까지 정조에게 쓴 편지 105통의 필사본이다.
편지에는 ‘연달아 천서(天書)를 받으니’라거나 ‘삼가 천찰(天札)을 받으니’처럼 임금의 글을 뜻하는 천서나 천찰이라는 표현이 수시로 등장하고, 박종악 자신을 ‘신(臣)’으로 칭해 그 수신인이 정조임을 알 수 있다. 자료를 발굴한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연구원은 “‘입을 세 겹으로 꿰맨 듯이 하라는 성상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표현도 장계 같은 공식 보고문이 아니라 비밀리에 의견을 교환한 편지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수기에 실린 편지글은 18세기 말 조선 천주교의 실상 파악에도 유용하다. 정조의 하명을 받은 박종악은 충청도의 여러 고을, 특히 일찍이 천주교가 퍼진 내포(현 충남 아산만 일대) 지역에 첩자를 보내 당시 ‘사학(邪學)’으로 불렸던 천주교의 유포 실태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정조에게 보고했다.
편지는 1791년 무렵 이미 충청도 전역에 천주교가 퍼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내포 강문리, 우평리, 홍주 신당면 신평리…온 마을이 거의 다 물들었다” “예산 두촌면 호동리의 경우 100호 가운데 물들지 않은 곳이 겨우 20호” 같은 보고 내용이 그렇다. 첫 조선인 세례자 이승훈이 중국에서 세례(1784년)를 받은 것이 불과 7년 전임을 감안하면 매우 빠른 확산 속도다.
정조가 말년에 정적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 2009년 2월 성균관대가 공개했다. 동아일보DB박종악은 자신이 파악하고 있던 충청도 천주교 지도자들의 소재와 동태를 정조에게 날짜 단위로 상세히 보고하면서도 이들 대부분을 체포하지 않고 감시만 했다. 압수한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는 정도였고 전향 다짐을 한 신자는 풀어줬다.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는 죄를 다스리지 말고 함께 새롭게 만들라’는 성상(정조)의 지극한 인(仁)과 큰 덕(德)에 따라 도로 풀어주었습니다.” 이는 천주교 탄압이 천주교인이 많은 남인세력에 대한 박해로 비칠까 우려한 정조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초기 순교자 중 양민이나 천민 출신이 많았음도 새로 밝혀졌다. 8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될 124위 중 한 명으로 그동안 양반으로 알려진 인언민은 ‘상한(常漢·양민이나 천인)’으로 기록돼 있다. 내포 지역 천주교 신자들의 지도자급 인물로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 가문을 천주교에 입문시킨 이존창도 사노비 출신임이 밝혀졌다.
장 연구원은 “수기는 천주교 수용이 양반 지식인들에게 국한되지 않고 신분을 초월해 폭넓게 이뤄졌음을 보여준다”며 “프랑스인 신부 샤를 달레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에만 의존해 온 초기 한국 천주교사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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