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술집서 데려온 그녀, 내 자취방에선 여신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19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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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취재기자를 포함한 90년대 학번 5명의 경험담과 주류업계 관계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독특한 도벽(盜癖)을 고백합니다. 30대 중반인 저는 20대 초반부터 학교 앞 삼겹살 집에서 자주 술을 마셨습니다. 취기가 오르면 선술집 벽면에 붙어있던 소주광고 포스터를 몰래 떼어 자취방으로 가져오곤 했습니다. 촉촉해진 제 눈에 보인 포스터는 아름다웠습니다.

10년이 훌쩍 흘렀습니다. 이사를 준비하던 중 서랍 속에서 여러 장의 소주광고 포스터를 발견했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포스터들을 비교해보니 시기별로 한국 사회의 특징과 분위기가 녹아있는 것 같았어요. 이후 주류업계와 유통업계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틈틈이 소주광고와 모델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IMF와 '산소같은 여자'

고교시절 선생님 몰래 술집에 간 기억이 납니다. 그 때는 소주광고 벽면 포스터에 최민수 유오성 등 터프한 '형님'들만 가득했어요. 서울 광화문 포장마차 주인 말로는 1980년대에는 아예 '카악'이라는 소리를 내며 한잔씩 꺾을 듯한 중년 모델(노주현, 백일섭)이 대세였습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1999년. 대학가 소주방에 붙어있던 이영애가 기억납니다. 외환위기(1997~1998년) 이후 취업난, 실직 등으로 삶이 팍팍해지다보니 서민들의 소주 접촉 빈도가 늘었답니다. 여성애주가가 늘어 저변도 확대됐어요. 이런 분위기에 맞춰 1999년부터 소주 알코올 도수가 25수에서 23도로 낮아졌습니다. 순해진 소주로 부드럽게 위로해줄 모델이 '산소 같은 여자' 이영애였죠. 포스터 속 이영애는 목까지 올라온 털스웨터를 입고 간호사 같은 표정을 짓고 있네요.

여성모델이 등장한 또 다른 이유는 소주 광고의 전달 수단이 '포스터'라는 점입니다. 알코올 도수 17도 이상의 술은 TV광고를 할 수 없어 포스터 광고에 의존해야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요 고객인 남성의 시각에 맞춰 여성 연예인이 등장한 거죠. 이영애 이후 황수정, 박주미 등 비슷한 분위기의 모델이 등장합니다.

●2002년 월드컵과 광장문화, 2007년 섹시코드

주류업체들은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모델 이미지를 바꿔야 했답니다. 거리 응원 후 한잔할 때 어울리는 스포티한 느낌의 모델을 찾아야했다는군요. 정답은 김정은. 포스터를 보면 김정은이 뺨에 손가락을 대고 개구지게 웃고 있네요.

대규모 거리 응원 이후에는 우리 사회에 '광장 문화'가 유행했죠. 처음 만난 사람과 한잔 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소주회사들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소통'을 키워드로 삼습니다. 당시 모델은 김태희(2003~2004년), 성유리(2005년), 남상미(2006년) 등이군요. 친근하게 웃으며 소주잔을 들고 건배를 권하고 있어요. 카피 문구도 "내 마음 알지", "사람이 좋아져요" 입니다.

2007년부터 소주광고포스터가 자주 사라지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모델이 야해졌기 때문입니다. 2007년부터 섹시 여가수 이효리가 소주모델로 등장했어요. 이전 모델과 달리 가슴 윗부분과 배꼽을 훤히 드러내고 말이죠. 이효리 사진을 소주잔 밑에 붙이는 '효리주'도 인기를 끌었죠. 신민아, 유이, 김아중 등 몸매가 '착한' 소주모델이 대거 등장합니다.

10년 동안 여자스타들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원래 여배우들은 소주광고를 꺼려했는데 이영애의 성공 이후 '한국 대표미녀=소주 광고모델'이라는 등식이 생기면서 서로 소주광고를 하려고 난리였답니다. 소주광고 모델을 섭외할 때는 '당대 최고 대우'를 약속했고요. 이효리는 1년 간 10억원을 받았습니다.

●2011년 자연미인, 2012년 케이팝

2011년에는 소주모델이 조금 얌전해졌어요. 먹을거리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100% 천연원료를 사용한 '자연주의' 소주가 유행했어요. 여기에 성형미인에 대한 거부감이 더해지면서 소주광고 모델도 자연미인을 선호하게 된 거죠. 문채원, 이민정이 등장한 이유입니다.

2012년부터는 소주광고에 한류 열풍이 불었어요. 케이팝(K-pop·한국대중가요)의 열풍을 업고 싸이를 비롯해 '카라'의 구하라, '포미닛' 현아가 모델로 등장했습니다. 아이돌 소주모델은 처음이에요. 아이돌 그룹은 미성년자가 포함된 경우가 많아 역효과가 난다는 거였죠. 관례를 깨고 아이돌을 발탁한 걸 보면 한류가 세긴 센 거 같아요.

앞으로는 다시 남자 소주모델이 등장할 수 있답니다. 포스터 이미지를 이어 붙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내러티브 지면 광고'가 유행하다보니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여성 뿐 아니라 남성 모델도 필요하다는 거죠.

[채널A 영상] 지역 따라 소주값 천차만별…바다 건넌 뒤에는?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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