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면 어떨까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9일 03시 00분


국내외 작가 16명의 퍼포먼스, 영상, 사진 30점 모은 ‘마스커레이드’전

《누구나 선천적, 후천적으로 부여받은 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하지만 가끔은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면 어떨까란 공상에 빠질 때도 있다. 통상 백일몽에 그칠 법한 상상을 현실로 만든 ‘카멜레온’ 같은 예술가들이 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코리아나미술관이 기획한 ‘마스커레이드(Masquerade·가장하기)’전은 변장을 기반으로 한 국내외 작가 16명의 작품을 모은 전시다. 1990년대 이후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영상과 사진 30점을 선보였다. 성 인종 민족 계급처럼 나를 대변하는 지표를 다른 사람과 바꿔치기한 작품들은 때론 웃음을 주고 때론 엽기적이다.》
변장과 역할극 등을 통해 관습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을 선보인 ‘마스커레이드’전에 나온 영상작품 ‘여름동화’. 작품 속에서 트랜스젠더와 남성이 백설공주로 등장해 고정된 성역할, 여성성의 표준에 의문을 제기한다.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변장과 역할극 등을 통해 관습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을 선보인 ‘마스커레이드’전에 나온 영상작품 ‘여름동화’. 작품 속에서 트랜스젠더와 남성이 백설공주로 등장해 고정된 성역할, 여성성의 표준에 의문을 제기한다.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내 안에 있는 새로운 나를 주목한 전시는 ‘가면 뒤의 가면’ ‘대중문화에 투사된 주인공’ ‘민족과 인종의 중첩’ 등 4개의 소주제로 구성됐다. 고정불변으로 믿어온 정체성의 허구를 짚어보면서, 나와 타자를 갈라놓는 경계선에 질문을 제기한 점에서 흥미롭다. 11월 10일까지. 2000∼3000원. 02-547-9177

질서와 억압에 도전하다

대부분 참여작가들은 현실과 비현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변장 퍼포먼스를 선택했다. 작가들은 연출과 배우를 맡아 1인 다역 드라마를 펼치며 사회가 강요한 질서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한 것이다.

이 중 자기 변형 퍼포먼스의 대표적 작가 리 보워리의 퍼포먼스를 담은 비디오 설치작품과 다큐 영화가 눈길을 끈다. 어릿광대처럼 과장된 화장에 남녀를 뒤섞은 옷차림으로 클럽무대에 올랐던 그는 1980, 90년대 런던과 뉴욕에서 전위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자기 내면의 숱한 타자를 드러낸 퍼포먼스는 이후 작가 데미언 허스트, 패션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 가수 보이 조지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신화 속 오르페우스부터 가수 조니 미첼까지 10명의 뮤즈를 의상과 분장으로 완벽 재현한 존 켈리, 분장과 가면으로 자신의 내적 분신을 표출한 강영호 씨의 작품도 놀랍다. 다이애나 왕세자빈으로 분장해 시중에 나도는 루머를 사진으로 재현한 앨리슨 잭슨, 고전 영화 속 등장인물로 변신해 새로운 스토리를 꾸민 밍웅 등은 과연 무엇이 진실이고 허구인지를 묻고 있다.

관습과 고정관념을 뒤집다

여성으로 분장한 앤디 워홀을 찍은 크리스토퍼 마코스의 ‘레이디 워홀’.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여성으로 분장한 앤디 워홀을 찍은 크리스토퍼 마코스의 ‘레이디 워홀’.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여자로 분장한 앤디 워홀을 찍은 사진 ‘레이디 워홀’ 연작, 잭 스미스의 실험영화 ‘황홀한 피조물들’은 성정체성에 대한 새 관점을 제기한다. 1963년 작 ‘황홀한 피조물들’은 복장도착자와 동성애자, 여자 옷 입는 남자를 담은 파격 영상으로 당시 상영금지가 됐다. 폴란드 작가 카타르지나 코지라의 영상 ‘여름동화’ 역시 중년여성 난쟁이들과 세 명의 백설공주가 등장해 성의 고정관념을 전복한다.

폴린 부드리와 레나트 로렌츠 팀의 ‘Normal Work’는 19세기 노동계층의 백인 여성인 해나 컬윅을 주제로 삼았다. 주인의 지시에 따라 컬윅은 흑인노예와 부르주아 남성 등 다른 인종과 계급으로 변장한 사진을 남겼다. 작가 혼자 여고생 단체사진 속의 모든 등장인물로 변신한 사와다 도모코의 사진들은 집단의식에 함몰된 일본 사회를 엿보게 한다. 한국작가 니키 리는 펑크족, 댄서 등 특정 집단과 어울린 뒤 자기 정체성을 지우고 새로운 나를 보여준다.

나는 누구인가. 학습된 정체성의 굴레를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며 사는 것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전시다.

고미석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전시#마스커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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