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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커버스토리]제주도 도깨비가 전해주는 요괴 이야기

입력 2012-08-11 03:00업데이트 2012-08-12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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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이… 왔다 당신의 뒤를 노린다“왜 같은 곳서 자꾸 익사사고가… 창귀를 조심하라고”
《 밤은 낮처럼 불길하게 밝았다. 누군가 수백 년 쌓아온 노기(怒氣)의 거대한 크기를 보여주려고 악을 쓰는 듯 불기둥은 치솟고 또 치솟았다. 몸을 녹여버릴 기세로 밀려드는 뜨거움. 마을 사람들은 방구석에 숨어 벌벌 떨었다. 불기둥은 세상 모두에게 불호령을 내리는 듯, 세상을 덮어버릴 듯 주홍빛으로 하늘을 물들였다. 집집의 하얀 유리창마다 주홍빛이 불길하게 일렁였다. 》

노인들은 누군가 나와 바깥 상황을 좀 보라는 듯 두려움에 떨면서도 겨우 힘을 내 소리쳤다. “요즘에 계속 밥때를 빠뜨리니 결국 도채비(도깨비의 다른 이름)님이 노한 거 아니꽈? 제발 누가 나서서 노기를 풀어봅서.” “게메 마씀(그러게 말입니다). 이리 난리가 나니 귀 눈이 왁왁하우다(캄캄합니다).”

동네 젊은이 하나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문을 열고 대청마루에 섰다. 그는 보았다. 불기둥은 뒷산에서 끊임없이 치솟고 있었다. “제당이우다. 불도채비님을 모신 뒷산 제당에서 불이 났수다.” 아직 마을 전체에 불이 번지지 않았다는 말에 사람들이 저마다 집에서 방에서 뛰쳐나왔다.

마을 사람들이 제당으로 몰려들었다. 이곳에선 대대로 불을 관장하는 도채비를 마을신으로 모셨다. 대대로 대장장이 일을 했던 이 마을 사람들에게 불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들은 불씨를 잘 관리해 달라며 밥을 먹기 전에 먼저 도채비에게 젯밥을 올렸다. 어른들은 정성이 부족하면 재앙이 내린다며 치성을 게을리하지 말 것을 대대로 신신당부해 왔다.

사람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불기둥은 제당 한가운데서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그냥 불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분노를 한껏 품은 뒤 커져버린 것이 분명한 요사한 불길이었다. 이때 불 속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내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불기둥 속에서 불길보다 무서운 호통이 내리쳤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밥 따위를 못 먹어 이러는 게 아니다.” 목소리는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지금부터는 표준말 위주로 쓴다). “나는 이곳을 떠날 것이다. 제당은 더이상 필요가 없으니 불태움이 마땅하도다.”

여든 살이 넘은 한 노파가 겨우 용기를 내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목소리가 답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늙은 도채비가 더 살아 무엇 하겠는가. 그러니 사라져야지. 그래도 아직까지 밥이나마 챙겨준 너희들에게는 수백 년을 같이 지낸 정이 있다. 그래서 떠나기 전 마지막 말이라도 남기고 싶어 너희를 불렀다. 이 불길은 내 공허함과 옛 기억을 태워버리기 위한 것이다.”

잡귀가 된 신

“도채비와 귓것(귀신), 우리는 원래 이 땅의 신이었다. 저 한라산에서 흘러내린 불에 녹은 바위가 이 섬의 앞바다를 지글지글 끓게 할 때부터였다. 마지막으로 불에 녹은 바위가 흘러내린 것이 1000년쯤 전이었다. 옛사람들, 그러니까 너희의 조상들은 우리를 공경하고 섬겼다. 그들의 믿음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힘도 세졌다. 그때는 참 좋았다. 온 몸이 눈처럼 흰 사슴(백록)과 푸른 노루도 있었지. 우리와 인간은 함께 섞여 살았다. 너희는 우리에게 제물과 처녀를 바쳤다. 아, 아름다운 비바리(처녀)들. 나는 많은 안해(아내)를 거느렸지만, 언제부터인가 처녀를 바치지 말라고 했다. 할망(할머니)이 되어 늙고 죽어가는 여인들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 천축국(인도)의 가르침이 들어왔지만 우리에 대한 공경은 계속됐다. 세월이 변한 것은 몽골의 말테우리(목동)들이 들어오고부터였다. 녀석들은 부녀자들을 농락하고 내 자식들을 죽였다. 등에 비늘이 돋은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장수감을 없애 고려를 영원히 지배하겠다’며 설쳐댔다. 그래서 나는 너희 조상들을 이끌고 이 산중으로 들어왔다. 옛 기억을 지키기 위해 혼인도 마을 안에서만 하도록 했다.

바깥세상은 너무도 급하게 돌아갔다. 세상의 이치를 탐구한다는 자들이 정권을 잡더니 중들은 물론이고 옛날부터 내려온 신을 모시는 무당들까지 핍박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신이 아니라 잡귀가 됐고, 때로는 우스갯거리가 됐다. 그래서 인간에게 해코지를 하는 녀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문명 시대 아니냐고? 착각하지 마라. 아직도 그런 녀석들이 꽤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말을 해 주는 것이다.”

#1 제주 평대리의 농부 고 서방은 바로 옆 밭에서 일하던 친구 양 서방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아까부터 친구는 초점 잃은 눈으로 힘없이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더위를 먹었나.’ 농부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는 친구를 추슬러 집으로 데려갈 참이었다.

그런데 양 서방이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쇠고삐를 풀어 자기 목에 묶기 시작한 것이다. “이봐, 더위를 먹어도 단단히 먹었군. 자네가 직접 밭이라도 갈 작정인가?” 양 서방은 고삐가 묶인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줄을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몇 번을 그렇게 했을까. 마침내 매듭 모양이 마음에 드는 듯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뭔가에 홀린 듯 근처 비자나무로 가더니 가장 튼실해 보이는 가지 아래 섰다. 양 서방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듯했다. 줄을 나뭇가지에 걸고 자신의 목을 묶더니 어느새 가져온 돌 위에서 발을 뗐다. 빨간 눈은 이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놀란 고 서방은 달려가 그의 몸을 쳐들었다.

“예끼, 몹쓸 사람. 아무리 사는 게 힘들어도 함부로 목숨을 끊으면 되나.” 그러자 양 서방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고맙네, 고맙네”란 말만 반복하는 게 아닌가. “자네, 혹시 우장(짚을 이용하여 고깔 모양으로 만든,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입는 복장) 입은 사람 보지 못했나? 갑자기 그 녀석이 나타나더니 내 목에 줄을 걸고 당겼다 풀었다 하면서 웃어댔잖아.” “밭에는 자네하고 소밖에 없었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도채비가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지금 얘기한 녀석은 그슨새라고 한다. 제주에만 남아 있던 요괴지. 요즘엔 몇몇이 숨기 좋고 일을 해치우기 좋은 뭍으로 갔다는 소문이 있다. 그슨새는 사람을 홀려서 죽이는 게 특기야. 특별한 이유 없이 재미로 한다더군. 아무리 밝은 대낮이라도 혼자 다닐 때는 조심들 하거라. 예전에는 우장을 쓰고 다녔지만 요즘엔 우산을 쓰고 다닌다는 말이 있어.

육지에는 그슨대란 놈이 있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그슨새와는 다르지. 으슥한 골목에서 어린애 모양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커지는데, 거기에 놀라 죽은 사람을 잡아먹는 거야. 요즘 이 나라에는 실종자가 꽤 많다고 하더군. 뭐, 연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 다음으로 조심해야 할 요물은 창귀(鬼)란 녀석이다. 도를 닦는 사람들 사이에선 워낙 유명하지만 너희들은 잘 모르는 것 같더군. 이 녀석은 말하자면 한을 품었거나 사고로 죽은 원귀야. 예전엔 호랑이에 물려 죽은 녀석이 많았는데, 요즘엔 보기가 힘들더군. 호랑이에 물려 죽은 사람 봤나? 너무 놀라 머리카락이 모두 쭈뼛 선, 해괴망측한 모습이지.”

#2 경기도의 한 동물원. 호랑이를 본 한 중년 여성이 뭐가 좋은지 쇠창살에 얼굴을 찰싹 들이댄다. ‘아내가 호랑이를 저렇게 좋아했나?’ 그런데 이상하다. 15년 동안 같이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홀린 듯한 눈빛. 여인은 모른다. 지금 호랑이 등 위에 창귀 한 마리가 앉아 있단 사실을….

“목골댁, 목골댁, 목골댁.” 강원도 영월땅의 한 며느리는 우물에서 물을 긷다 말고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아득히 먼 산만 눈에 들어올 뿐이다. 며느리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목골댁!’ 그날 밤 잠을 자던 며느리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또 들었다. “뉘시오?” 남편과 사별한 며느리와 한 방을 쓰는 시어머니가 며느리 대신 답했다. 그때 갑자기 문이 부서지더니 어둠 속에서 얼룩덜룩하고 커다란 물체가 며느리의 배 위를 뛰어넘었다. 순간 풍기는 역한 노린내. 호랑이였다.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그러나 호랑이의 입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물려 있다. 시어머니다. 호랑이는 시어머니를 물고 산으로 도망쳤다. 며칠 후 시어머니는 산 근처 바위에서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호랑이에게 물어 뜯겨 머리 빼고는 성한 곳이 없었다.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와 홀로 잠든 며느리의 꿈속에 한 낯선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숨진 시어머니처럼 온몸이 할퀴고 찢겨 내장이 다 튀어나와 있었으며 성한 곳을 찾아볼 수 없는, 기괴한 몰골이었다. 남자는 며느리에게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쉽다. 원래 내 자리는 네 차지였는데….” 남자는 홀연히 사라졌다. 생각해 보니 그때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였다.

도채비는 경고했다.

“호랑이가 없어졌다고 해도 창귀를 잊어버려서는 곤란해. 창귀는 물속에도 있거든. 창귀는 자기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못 찾으면 평생 그 자리에 있어야 해. 그래서 언제나 희생양을 찾아 헤매지. 왜 사람이 물에 빠져 죽은 자리에서 자꾸 익사 사고가 나는지 잘 생각해 봐. 창귀가 부르는 소리가 나면 절대 대답하면 안 돼. 창귀가 되기 싫으면 말이야.”

인간의 끝없는 욕심 막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불덩이 건너편의 목소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너희를 괴롭혔을 땐 다 이유가 있었어. 너희의 끝없는 욕심에 제동을 걸 누군가가 필요했기 때문이지. 우리는 인간에게 ‘과욕은 금물’이라는 교훈을 주며 인간들을 가르치고 인간들이 더 지혜로워질 수 있도록 도왔다. 이건 너희 스스로도 인정한 것이야.”

#3 고려 말 개경의 한 기와집에서는 언제부턴가 매일처럼 사람이 죽어나갔다. 첫날에는 집을 지키던 종놈이, 두 번째 날에는 마님을 모시던 몸종이 당했다. 모두 끔찍한 것을 본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였다. 마침내 남은 것은 외동딸 혼자였다. 딸은 안채를 쓰기가 겁이 나 부엌에서 혼자 잠을 잤다.

어느 날 저녁,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자기의 이름은 김득이며, 밤늦게 돌아다니다 순라꾼(오늘날의 순경)에게 쫓겨 우연히 집에 들어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여자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김득은 자신이 해괴한 변고의 이유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밤이 깊은 뒤 촛불을 밝혀 글을 읽는 김득 앞에 웬 노인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 노인의 모양이 기괴했다. 얼굴과 손발은 황금색이고 눈에는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온몸은 시체처럼 빳빳했다. 머리에는 거미줄과 온갖 먼지가 쌓여 있었다. 옷은 비를 맞은 듯 축축했다.

노인은 자신이 창고에 살고 있으며, 10년 동안 이곳에 묶여 있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 집 부부가 욕심이 많아 자기를 어두운 창고에 가두어놓고 꺼내서 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인은 “어둡고 침침한 곳에서 살았더니 매일 낮밤을 가리지 않고 잡귀가 붙어 나를 괴롭힌다네.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나를 보내주오”라고 애원했다.

김득이 창고를 뒤져보니 과연 먼지가 뽀얗게 쌓인 황금 노인상이 하나 나왔다. 밖으로 꺼내 살펴보니 빛깔이며 생김새가 어제 만난 노인과 꼭 닮아 있었다.

김득은 황금상이 있어야 할 곳을 고민했다. 황금은 제값을 받고 팔려나가 온 세상을 돌아다녀야 제 가치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황금상을 시장에 가져다 팔았다. 그제야 집안에 귀신이 나타나지 않았다.

도채비는 한숨을 쉬었다. 긴 한숨을 따라 반딧불이 같은 불똥이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었다. 사람들은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도 황금귀에게 걸린 사람들은 운이 좋았어. 참, 너희들 닭이 몇 년이나 사는 줄 아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도채비가 말했다. “자그마치 30년이야. 아무도 몰랐을 거야. 저 멀리 강남(동남아시아) 쪽에는 오래 묵은 닭이 요괴가 된다는 얘기가 있어.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가 그 집 식구들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거지. 오래전, 이 땅에 생선젓갈 만드는 법을 가져온 사람들과 함께 그런 요괴들도 들어왔지. 수백 년 묵은 지네나 지렁이 얘기 들어본 적 있지 않나? 특히 흰 짐승들이 오래 묵으면 도력이 세져. 얼마 전에 이사를 간 옆 마을 김 씨 생각나나? 밤에만 나돌아 다녔지. 낮에 찾아가면 하얀 개 한 마리만 꼬리를 치고 있고 말이야. 사실은 그 개가 바로 김 씨야. 나같이 마음 약한 존재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려 하지만, 김 씨 같은 자들은 그럭저럭 사는 재미가 있는 모양이더라고.”

마을 사람들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도채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몇몇 사람은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고 겁에 질린 어린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이를 지켜보던 도채비가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도채비의 침이 튄 자리에 불이 옮겨붙었다. 어느새 불이 번져 제당에 모인 사람들을 에워쌌다. 자리에서 도망치려다 불에 닿은 몇몇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야. 힘이 나는군. 우리는 원래 사람들의 두려움도 먹고 사는 존재니까.”
▼ 토종귀신-요괴들 근대화되면서 모습 바뀌고 설 땅 잃어 ▼



#4 성리학이 득세한 조선시대에도 요괴들은 완전히 배척당하지는 않았다. 선비들은 요괴를 ‘음사(淫祀)’라고 부르며 싫어했지만 공존하는 방법을 택했다. 전통적인 마을신앙을 일방적으로 금지하지 않고 유교식 제사 방법인 주자가례를 이용하도록 권장하는 식이었다. 도깨비와 귀신은 전국을 떠돌거나 한곳에 정착해 백성들과 함께 지냈다. 그렇게 정착한 귀신과 요괴들은 인간들에게 도움을 줬다. 사람들이 요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라도 나쁜 짓을 할 수 없게 했다.

일제강점기에도 마을신앙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단지 무차별적으로 들어온 일본문화가 우리나라 요괴들의 모습을 바꿔버렸다. 본래 우리 도깨비는 뚜렷한 형태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일본에서 건너온 ‘뿔 달리고 치마 입은’ 오니가 우리나라 도깨비의 모습이 됐다.

근대화가 될수록 토종 귀신과 요괴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귀신과 요괴들은 형광등이 환하게 켜진 도시에는 가기 싫다고 입을 모았다. 밤이면 불을 켜고 사람들을 놀래던 재미로 살던 도깨비들은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본 뒤로는 기가 죽어버렸다. 마을마다 있던 거처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요괴는 모두 미신이라고 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해 ‘머털도사와 108 요괴’ ‘꼬비꼬비’ 같은 만화영화가 등장했을 때는 만세를 불렀다. 우리 요괴들이 다시 주목을 받는다고 다들 마음이 들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귀신과 요괴들은 다시 잊혀졌다.

도채비의 목소리에 허탈함이 묻어났다.

“예전에 긴 가뭄이었을 때는 한강의 용을 자극해 비를 부르기 위해 강물에 호랑이 머리를 던지기도 했다더군. 요즘 그런 일을 했다간 오히려 나라에 벌금을 내야 할걸? 우리는 이제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어. 우리는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됐어. 내 얘기는 여기까지다. 이제, 사라질 때가 됐다.”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갑자기 더욱 거센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사람들은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씩 쓰러졌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제당은 불에 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불이 붙었던 다른 곳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했다. 기절했던 사람들도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을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평화로웠다. 소방관들은 제당에 두었던 촛불이 넘어져 작은 불이 났다고만 했다. 불도채비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 참고 문헌

도시에서 유행한 <빨간 마스크>의 변이와 속성에 대한 시론. 김종대 한국민속학회(2005) ·한국의 전통무기와 설화속의 몬스터(프로젝트). 한국콘텐츠진흥원(2002) ·한국의 풍속 민간 신앙. 최준식,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2005) ·도깨비를 찾아라!. 김성범, 문학들(2011)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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