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당신은 지금 자신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10일 03시 00분


◇피로사회/한병철 지음/128쪽·1만 원·문학과지성사

철학서 ‘피로사회’를 펴낸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현대인은 자기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다. 그러기에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고 말한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철학서 ‘피로사회’를 펴낸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현대인은 자기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다. 그러기에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고 말한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무엇을 하지 마라’ 혹은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강압적인 말보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은 얼마나 듣기 달콤한가. 하지만 정말 그럴까. 열심히 노력해도 쳇바퀴 도는 듯한 인생, 탈출구가 있기는 한 걸까.

‘21세기 사회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는 게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푸코가 주창했던 ‘규율사회’는 부정적인 강제가 있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성과사회’에는 그런 눈에 띄는 규율이 없다. 다만 무한한 ‘할 수 있음’, 실체도 불분명한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하다.

한병철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 교수가 펴낸 이 책은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운 착취 형태를 꼬집는다. 지난해 독일에서 출간돼 호평을 받았으며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덴마크 중국 등에도 소개됐다. 8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한 교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영악해졌다”고 지적했다. “금지, 명령을 통한 착취에서 이제는 ‘너는 할 수 있다’를 주입시키는, 자유를 통한 착취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타인착취’를 하다가 한계에 다다르자 ‘자기착취’를 만들어낸 겁니다.”

타인착취에는 한계가 있다. 주인(회사 등)이 없어지면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자기착취에는 한계가 없다.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에 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학대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이런 자기 망상 속에 함몰된 인간은 피로해 쓰러질 때까지 일한다. 피로가 좀처럼 풀리지 않고, 누적되는 ‘피로사회’의 일원이 된다. “요즘 독일에서는 ‘번 아웃(burnout·소진) 신드롬’이란 용어가 유행입니다. 독일 사회에서 여유를 상징하던 교수들도 월급은 줄고 외부에서 돈은 끌어와야 하는 압력이 상당히 심합니다. 모두 피곤해지는 거죠.”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등과 같은 솔깃한 광고 카피들은 어떨까. “결국 다시 쉬고 일하라”는 ‘노예의 쉼’이라고 한 교수는 말했다. 스스로 주인이 돼 삶을 영위하지 않고서는 일하는 것도, 쉬는 것도 결국 자본주의의 노예의 일상일 뿐이라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그럼 피로는 어떻게 푸나. “‘나인(Nein·아니요)’이라고 말하라”는 게 함축적인 저자의 답. ‘긍정’을 ‘부정’해야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얼마나 해를 끼치고 있나’ 하는 것을 인지하는 게 문제를 풀기 위한 출발이다. 결국 이기적인 나에서 벗어나 자기를 열고 다른 사람,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전문적인 용어도 많고, 문장도 함축적이라 의미 파악이 쉽지 않다. 하지만 다른 철학자의 논리를 장황하게 끌어오거나 불필요한 철학사를 덧대는 일 없이 자신의 논리만 툭툭 던지는 스타일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철학 이론을 담았지만 시집처럼 얇다. “이 책은 뼈(이론)만 있고 살(정보)은 없다”는 저자의 설명이 딱 맞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