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미군부대 근처 성매매 여성들 찾아올 때 괴로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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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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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정부 독려로 파견된 한국 의사들이 그곳에 남았던 이유

1 환자를 진료하는 김시원 씨(카메룬, 맨 위 왼쪽) 2 의료물품을 전달하는 김명호 씨(레소토, 맨위 오른쪽)
3 니제르 니아마 병원 앞의 김대수 씨(가운데 왼쪽) 4 산타로 분장한 김정 씨(보츠와나, 가운데) 5 병원 앞의 안순구 씨(코트디부아르, 가운데 오른쪽 아래) 6 회진 중인 유민철 씨(에티오피아, 아래) 7 보츠와나 사람들과 함께 한 김정 씨의 부인 남궁연남 씨(맨 아래) KOICA 제공
1 환자를 진료하는 김시원 씨(카메룬, 맨 위 왼쪽) 2 의료물품을 전달하는 김명호 씨(레소토, 맨위 오른쪽) 3 니제르 니아마 병원 앞의 김대수 씨(가운데 왼쪽) 4 산타로 분장한 김정 씨(보츠와나, 가운데) 5 병원 앞의 안순구 씨(코트디부아르, 가운데 오른쪽 아래) 6 회진 중인 유민철 씨(에티오피아, 아래) 7 보츠와나 사람들과 함께 한 김정 씨의 부인 남궁연남 씨(맨 아래) KOICA 제공
《 그들은 초대받지 않았다. 한국이 원조(援助)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탈바꿈했음을 선언하며 1일 막을 내린 부산 제4차 세계개발원조총회에 그들의 자리는 없었다. 지난해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하면서 수원국(受援國)에서 원조제공국으로 전환한 세계 최초의 나라가 됐을 때도 그들은 기억되지 않았다.

40여 년 전, 우리나라가 빈국 처지를 겨우 벗어나려 할 즈음 그들은 더 열악하고 가난한 땅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곳에서 의술(醫術)이라는 원조를 베풀었다. 정부파견의사라고 불린 그들은 사실상 한국 원조의 원조(元祖)다.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는 당시 파견돼 아프리카에서 20여 년간 봉사한 신장곤(80·외과) 송필연 씨(75) 부부, 김명호(77·외과) 김촌경 씨(75) 부부, 그리고 김정 씨(1999년 보츠와나에서 작고·외과)의 부인 남궁연남 씨(78)에게서 원조의 기억을 들었다. 》
○ 자유로운 영혼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말 맞지요. 그렇지 않으면 안 가죠.” 송필연 씨는 말한다. 남궁연남 씨가 자신의 남편을 ‘자유로운 영혼’으로 표현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크게 공감한 듯했다. 사실이 그랬다. 주위에서는 “그렇게 험한 곳에 뭐 하러 가냐” “무슨 죄 지었냐”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비록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한국의 경제상황이 어려웠다고 해도 명색이 의사였다. 의사 선생님, 의사 사모님 소리를 들으며 중류층 이상의 생활을 꾸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을 떠났다. 당시 유행하던 미국 TV 드라마 ‘타잔’에서 본 아프리카 생활상 정도의 지식을 지닌 채 미지의 땅으로 향했다.

이들은 어쩌면 고지식했다. 자본주의가 성숙해지고 있는 사회에서 인술(仁術)은 그저 ‘인술(人術)’에 그치는 게 아니라 상술(商術)이 가미돼야 한다는 사실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명호 씨는 당시 충남 부여의 ‘성요셉병원’에서 외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개업하기를 꺼렸다. “개업하면 아무래도 속된 말로 환자한테 돈을 뜯어야 하니까, (증세에 대해) 과장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경기 포천에서 개업한 지 2년째가 되던 고 김정 씨도 비슷했다. 당시 미군부대 주변에서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낙태를 해달라고 찾아올 때마다 그는 괴로워했다고 남궁 씨는 말했다. 부산에서 병원을 하던 신장곤 씨는 의사가 환자만을 대하지 않고, 각종 세금 계산과 약값 정산에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경찰, 공무원을 상대하는 데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아내 송 씨는 “의사가 의사 본연의 업무만을 못하는 것에 실망하고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고 했다.

자신이 사랑했던 보츠와나에서 숨을 거둔 김정 선생. 그의 아들인 사진작가 김중만 씨가
찍었다. 김중만 씨 제공
자신이 사랑했던 보츠와나에서 숨을 거둔 김정 선생. 그의 아들인 사진작가 김중만 씨가 찍었다. 김중만 씨 제공
정부가 내건 물질적 조건도 마음을 당기는 요인 중 하나였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0∼300달러 정도였다. 정부파견의사로 나가면 월 600달러가량이 보장됐고 준외교관 자격을 부여한다고 했다. 아프리카행 항공료는 각자 지출해야 했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물론 현지에 도착해 보니 그 액수로는 한국에서 생각한 만큼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허리띠를 졸라매야 아이들 교육비를 충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국 정부는 준외교관 자격을 준다고 했지만 주재국에서는 ‘모르는 소리’라는 반응이었다.

또한 해외에 나가는 게 쉽지 않은 상황에서 외국을 갈 수 있다는 것도 유혹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이민(移民) 바람이 불고 있었고, 아이들의 장래 교육문제를 생각해 볼 때도 나쁘지 않은 선택으로 생각됐다. 당시 정부파견의사로 나간 의사들 중에는 아프리카를 발판으로 해서 2년 계약 기간을 채우고 다른 나라로 이주한 사람도 소수지만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은 낭만적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보다는 보는 관점에 따라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30대 후반∼40대 초반의 한창 일할 나이였던 이들은 신천지에 대한 호기심과 진정한 의술을 마음껏 펼쳐보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김포공항에서 비행기 트랩을 오를 때 이들의 마음속에는 ‘슈바이처’가 조금씩 자리 잡고 있었다.
▼ 유골로 온 ‘슈바이처’에게 정부는 묻힐 공간도 주지 않았다 ▼

○ 2년이 4년이 되고…


“(아프리카 국가들이) 유엔에서 손 들어달라고 우리 보낸 거였잖아요.” 남궁 씨는 말했다.

당시 정부파견의사들은 정기적으로 본국에 보고서를 보냈다. 그 보고서에는 해당 국가에 나와 있는 북한 인사들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살피는 동향 파악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냉전이 한창이던 때, 한국과 북한은 유엔 가입을 목표로 더 많은 나라의 지지를 얻으려 안간힘을 썼다. 1960년을 기점으로 아프리카에서 프랑스 영국 등 유럽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국가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자 신생 독립국들에 대한 한국, 북한의 외교전은 더욱 거세졌다.

한국 정부는 1964년 외교 전략의 일환으로 우간다 정부와 최초로 의사 파견 계약을 했다. 김명호 씨도 1978년 정부파견의사가 되기 전까지는 우간다 계약 의사로 6년간 일했다. 한국 정부는 1965년 아프리카 순방 사절단을 파견해 이 신생국들이 자국에 부족한 의료진을 파견해 주길 원한다는 것을 파악했고, 1968년 니제르, 감비아 등과 기술원조 협정을 체결하고 정부파견의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물자를 원조할 여력이 없는 후진국, 한국 정부가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큰 외교적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택한 셈이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가봉과 중앙아프리카에서 24년간 봉사한 신장곤 씨. 그는 80세인 지금도 한 요양병원에서 진료를 하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가봉과 중앙아프리카에서 24년간 봉사한 신장곤 씨. 그는 80세인 지금도 한 요양병원에서 진료를 하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정부파견의사 가운데 갈 때부터 아프리카에 계속 남아서 봉사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O₂가 만난 이들도 “짧아도 2년, 길면 4년” 정도를 생각하고 현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쉽게 발을 떼지 못하게 됐다.

“처음에 왔을 땐 후회했지요. 병원이라고 갔는데 에어컨 속에는 뱀들이 똬리를 틀고 있지, 자고 일어나면 신발 속에도 있지. 많이 놀랐어요.” 1970년 어퍼볼타(현 부르키나파소)에 도착한 남궁 씨의 술회다. “그런데 닥터 김(남편)은 전혀 후회하지 않았어요. 수술 잘됐다고 와인 한잔하며 그렇게 좋아할 수 없을 때는 ‘내가 의사 남편 둬서 잘했다’ 싶었지요.” 남궁 씨는 고맙다며 신문지에 싼 맥주 두 캔을 가져온 환자의 이야기를 꺼내며 웃던 남편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고 했다.

커다랗고 둥근 눈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신을 낫게 해준 그들을 ‘신(神)’처럼 따를 때의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봉과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1969년부터 24년간 일한 신 씨는 “움막 같은 집에서 나를 구세주인 양 바라보는 그 순하디 순한 눈길을 대하면 아무리 힘든 길이라도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우간다, 케냐, 말라위, 레소토에서 역시 24년간 일한 김명호 씨도 “죽을 위기에 처한 환자를 여럿 수술해서 내보내는 맛으로 살았다”고 했다. 세월 가는 줄 몰랐고, 후회하지도 않았다. 사명감이 없었다면 그 일을 어떻게 했을까. 신 씨는 “처음 출발할 때는 (사명감이) 희미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자의 반 타의 반 (사명감이) 단단해졌다”고 했다.

그렇다고 어디 시종일관 행복한 나날이었을까 싶다. 김정 씨의 맏아들인 사진작가 김중만 씨는 일전 한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아버지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의사였다. 돌아가셨을 때 남긴 것은 안경 한 벌과 2000달러가 다였다”고 했다. 이 글을 어디서 읽었다는 송 씨는 “그 말이 정말 맞다”고 했다. 딸 둘, 아들 하나를 교육시키기에 월 600달러는 결코 큰돈이 아니었다. 현지에 와있던 프랑스, 벨기에 의사들이 수영장과 농구대가 딸린 저택에서 살던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들이 “아빠는 같은 의사인데 왜 우리는 저렇게 못 살아?”라고 물어보면 답이 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버텼다. “자기가 하기에 달렸죠. 못살겠다고 하면 바보지요. 자기 나름대로 쪼개 살면 살 수 있어요. 물론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요.” 신장곤, 송필연 씨 부부의 말이다.

○ 붉은 때가 밀린다

1975년부터 에티오피아에서 30년간 봉사한 유민철 씨에 대한 현지 신문 기사. KOICA 제공
1975년부터 에티오피아에서 30년간 봉사한 유민철 씨에 대한 현지 신문 기사. KOICA 제공
1986년 정년퇴직(60세)을 하고 1988년 고국으로 돌아온 김정 씨는 첫 두 달은 아주 편한 듯 보였다. 밤에 응급환자가 불러낼 일도 없으니 잠도 곤히 잘 수 있었다. 88 서울 올림픽도 구경했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자 김정 씨가 아내 남궁 씨에게 말했다. “당신 혼자 여기 있어요. 나는 아프리카로 돌아갈 테니.” 아프리카 남부 보츠와나에서 14년을 지낸 그에게 한국은 너무 번잡하고 격식을 차렸고, 남의 일에 간섭하고 경쟁하는 삶의 연속이었다. 자유주의자였던 김정 씨에게 한국은 답답했다. 그는 한국을 떠나 자신이 일하던 보츠와나의 병원에서 무료로 4년을 더 봉사했다. 그리고 1999년 별세했다. 그의 유골을 들고 남궁 씨가 2001년 홀로 귀국하니 모실 곳이 마땅치 않았다. 정부는 유골이 묻힐 공간 하나 제공하지 않았다.

1994년 귀국한 송 씨는 한동안 대중탕에 가지를 못했다. 24년간 아프리카의 땡볕 아래서 붉은 흙을 밟고 붉은 먼지를 맞다 보니 그의 몸에선 붉은 때가 나왔기 때문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피부가 아프리카 사람처럼 까맣다”고 한마디씩 했다. 피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신 씨의 행동도 느려지고 말도 더듬더듬했다. 주변에서는 ‘아프리카식’이라고들 했다. “아프리카에서는 모든 게 ‘천천히’지요. 오늘 못하면 내일, 내일 못하면 모레 또 하면 어때서…. 거기 방식에 젖으니까 여기 와서도 머리가 빨리 안 돌아가고 답답했죠.” 사람들은 ‘저 양반은 외국 물을 먹었다면서 빨리빨리 머리가 안 돌아가나’ 하듯 쳐다봤다.

그러나 정작 답답한 건 신 씨의 행동이 아니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아프리카에서 나라를 위해 의료봉사를 하고 돌아온 그가 할 일은 없었다. 매스컴은 그의 귀국을 반기며 인터뷰를 한다, 난리였지만 정부파견의사제도를 관리하는 외무부(현 외교통상부)와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귀국한 지 7년가량이 지난 뒤 KOICA에서 유리로 만든 감사패를 우편으로 전해준 게 전부였다. 또 의료계에서도 엄연히 한국에서 의사면허와 전문의 자격을 딴 그가 아프리카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갈 수 있으면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가고도 싶었다.

“많은 공무원이 연금을 받고, 보상을 받는데 우리는 연금도 없어요. 연금을 받을 자격은 당연히 있는 거 아닌가요. 훈장 줄 생각 말고 먹고살 수 있게 좀 해주지, 제도적으로 너무 허술해요. 어려운 일은 우리가 하고, 생색은 정부가 내는…. 우리는 도구였어요. 그게 좀 억울하지요.” 송 씨가 말했다.

○ 그래서 그들은 아프리카로 갔다

김명호 씨는 1996년 퇴직한 뒤 귀국해서 충남 서천의 한 병원에서 2년간 근무하다 아들들이 사는 미국으로 갔다. 남궁 씨는 2006년부터 서울시에서 일당 8000원을 받고 일본어와 영어 통역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달(다음 달에는 장소를 옮긴다)에 서울 청계광장에 가면 외국인들과 이야기하는 그를 볼 수 있다. 아직도 아프리카 사람들을 보면 친정 식구 보듯 반갑다고 한다. 무릎이 아프지만 무료로 탈 수 있는 지하철이 그렇게 마음 편하단다. 신 씨는 경남 진주에 사는 의사 이덕섭 씨의 도움으로 그의 병원에서 4년간 진료를 했다. 이 씨는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셔서 우리가 마음 놓고 한국에서 일할 수 있었다”고 말하며 신 씨를 모셨다. 신 씨는 지금 부산의 한 요양병원에서 진료를 보고 있다. 집에서 병원까지 지하철역 계단 160개를 오르내리며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송 씨는 “그동안 살면서 봉사한 대가를 받고 있다고 봐요. 건강하게 진료하는 걸로…”라고 말했다.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하곤 한다. “한국에도 병원 문턱을 넘지 못하는, 어려운 사람이 많다. 이처럼 가까운 사람들도 돕지 못하는데 무슨 아프리카 사람들까지 돕느냐”고. 신 씨는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가까이 있는 어려운 사람 돕는 데 열심인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렇다. 그래서 그들은 아프리카로 갔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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