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100명 넘는 파견의사 발자취, 뒤늦게 한권의 책으로 정리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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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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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기특한 일을 했다. 1968년 시작돼 2008년 활동을 마친 정부파견의사 제도를 정리한 책 ‘가난한 지구촌 사람들을 사랑한 한국의 슈바이처들’(사진)을 낸 것이다. 이 책에는 40년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한 의사 가운데 31명의 이야기가 정리돼 있고, 이 제도에 대한 간략한 평가와 정부파견의사 115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 우리에게도 ‘영웅’은 있다

이 책은 심의섭 아랍아프리카센터 이사장(67)이 기획했다.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인 심 이사장은 1977년 여름 보츠와나에 갔을 때 정부파견의사로 와 있던 김정 씨(1999년 작고)를 만났다. 당시 수도 가보로네에서 400km가량 떨어진 프랜시스타운에 살던 김 씨와 부인 남궁연남 씨가 한국인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차로 4시간을 달려 심 이사장 일행을 만나러 온 것이다. 차에는 김치, 고추장, 된장찌개, 갈비탕, 콩나물국이 실려 있었다. 김 씨 부부는 심 이사장과 날이 새도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아프리카에서 의사로서 일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야기했다.

이후 아프리카를 공부할 때마다 김 씨 부부의 경험담과 정부파견의사들의 봉사하는 모습이 심 이사장의 머리에 떠올랐다. 이처럼 숭고한 활동 내용은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하나의 소명과 같았다”고 했다. 이후 몇 차례 외교통상부(과거에는 외무부) 관계자들에게 이런 기획을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2008년 12월로 정부파견의사 제도가 종료되고 나자 그의 제안을 외교통상부에서 받아들였다. 실제 업무를 관장하던 KOICA는 재원을 마련하고 그동안 보관해온 정부파견의사 제도 관련 자료를 제공했다.

지난해 8월부터 본격적인 자료 정리가 시작됐다. 아랍아프리카센터의 최영로 박사가 일을 맡았다. KOICA에서 보관해온 자료는 높이 약 180cm, 너비 약 1m의 책장 2개 반을 가득 채우는 분량이었다. 정부파견의사 개개인별로 된 파일 뭉치는 사람마다 두께가 달랐다. 파견된 지역에 있는 북한 관련 동향보고가 포함된 보고서는 기밀로 분류된 것이 많아 외부로 유출하거나 복사를 할 수 없었다. 최 박사는 KOICA 회의실 한편에서 자료의 내용을 일일이 훑으며 주요 내용을 컴퓨터에 옮겼다. 6개월의 산고 끝에 올해 3월 책이 나왔다.

정부파견의사들의 보고서 내용 중에는 책에 싣지 못한 것도 많았다. 후진국에서 온 의사라며 야근 당직만 돌게 하는가 하면, 해당 국가에서 해주기로 돼 있는 숙소를 마련해 주지 않아 월급을 쪼개어 호텔에 장기간 머물기도 했다. 그나마 마련해 준 숙소는 치안 상황이 너무 안 좋은 곳에 있어 가족들이 밤새 마음을 졸이며 뜬눈으로 새우는 일도 있었다.

심 이사장은 “국가적 영웅은 그냥 저절로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 정부파견의사 커뮤니티를 만들자

자료를 정리하면서 최 박사가 겪은 어려운 일 중 하나는 이들 정부파견의사가 생존해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 사는지를 일일이 혼자서 확인해야 하는 것이었다. KOICA는 이들 115명의 연락처를 파악하고 있지 않았다. 대한의사협회에도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의협이 긍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겨우 연락이 된 사람에게 전화를 걸면 “어떻게 내 연락처를 알았느냐”며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했다. 이들이 해외에서 업무를 마치고 귀국하면 정부 차원에서는 어떤 특별한 관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부파견의사가 115명이 다인지도 불확실하다. 미국에 거주하는 김명호 씨(1978∼1996년 말라위 등 4개국에서 활동)는 “고교 후배가 아프리카 스와질란드에 정부파견의사로 있다가 퇴직한 뒤 현지에서 개업했는데 이 책에는 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가봉에 파견된 한국인 1호인 신장곤 씨(1969∼1993년 가봉·중앙아프리카에서 활동)도 1994년 그의 책 ‘싱기라 싱기라 닥터 신’에서 정부파견의사가 당시까지 123명이라고 적었다. 결국 외교통상부에서 KOICA로 자료가 넘겨지면서 일부가 누락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 박사는 “활동 기간이 짧든 길든 정부파견의사들의 커뮤니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활동을 마친 의사 중에도 비슷한 의견을 내는 이가 있다. 남궁연남 씨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했던 의사와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의미를 한 번 더 되새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제도의 초창기에 활동했던 의사들 가운데는 이미 세상을 뜬 분들이 적지 않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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