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한경혜-영혜 서울대 자매교수의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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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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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래머리 땋아주시던 아버지, 그 큰사랑 그립습니다

아버지의 큰 사랑으로 행복한 추억과 안정된 정신세계를 얻었다는 한경혜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교수(56·오른쪽)와 한영혜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54·일본연구소장). 두 사람은 자매가 함께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인 특별한 사례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아버지의 큰 사랑으로 행복한 추억과 안정된 정신세계를 얻었다는 한경혜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교수(56·오른쪽)와 한영혜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54·일본연구소장). 두 사람은 자매가 함께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인 특별한 사례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한 걸음도 다가설 수 없었던/내 마음 알아주기를/얼마나 바라고 바라왔는지/눈물이 말해 준다/점점 멀어져 가버린/쓸쓸했던 뒷모습에/내 가슴이 다시 아파온다’ ―인순이 노래 ‘아버지’ 중에서

아버지, 당신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묵묵히 가족 부양에 애쓰는, 말없는 커다란 등으로만 새겨지는가. 주말이면 소파에 모로 누워 알량한 TV 리모컨 권력을 휘두르는 건조한 남성으로 남아 있는가. 아니면 밖에선 순한 양처럼 굴다 집에 들어만 오면 호랑이로 변하는 이중적 인간으로 여겨지는가. 여기 한 자매가 있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한두 가지 회상으론 모자라 밤을 꼬박 새우는 두 사람이다. 아버지를 처음 기억하는 것도 아닌데 할 때마다 수다가 끊이지 않는 두 여성이다. 자기만 간직했던 아버지와의 경험을 꺼내며 결국에는 눈물을 찍어내는 두 딸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아버지, 자식들이 이토록 즐겁게 기억하는 걸 보면 인생에 성공하신 거야.”

한경혜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교수(56)와 한영혜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54·일본연구소장) 그리고 2009년 별세한 아버지 한금석 씨(1930년생)의 이야기다.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는 한국 중년 아버지의 성공적인 노년 만들기를 취재하다 만난 자매 교수에게서 정말 ‘행복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
○ 손수 김밥 말아 두 딸과 소풍도

아버지 한 씨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2009년 1월 호스피스 병동에서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로 누워 있었다. 어느 날 목욕 자원봉사자 남녀 1명씩이 한 씨 가족의 요청으로 병실을 찾았다. 샤워기가 3개 달린 특수 목욕통에 아버지를 눕히고 자원봉사 남성은 다리를, 여성은 머리와 면도를 맡았고, 경혜 씨도 목욕을 거들었다.

2009년 별세한 자매 교수의 아버지 한금석 씨. 아래는 그가 결혼 직전 사진 뒷면에 쓴 글귀로, 부인에게 백년해로를 다짐하는 내용이다.
2009년 별세한 자매 교수의 아버지 한금석 씨. 아래는 그가 결혼 직전 사진 뒷면에 쓴 글귀로, 부인에게 백년해로를 다짐하는 내용이다.
1분 남짓 지났을까. 경혜 씨가 앙상한 아버지의 몸을 보며 눈물을 머금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가 무척 자상하신 분이었나 봐요.” 자원봉사 남성이 말했다. 경혜 씨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묻자 그가 답했다. “따님이 아버지 몸을 씻겨 드리는 걸 보면 알지요.”

그랬다. 무척 좋은 아버지였다.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데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지만 깨알같이 많은 추억을 함께 만들어준 아버지였다. 여느 아버지처럼 말로는 애정표현 한번 곰살맞게 하지 않았지만 그 사랑을 몸으로 한껏 보여준 아버지였다.

경혜, 영혜 씨 가족은 1960년대 초반 충남 보령시 웅천면의 한 초가집으로 이사했다. 그 몇 해 전, 아버지는 대전에서 하던 사업이 실패해 튼실하던 가산을 정리한 뒤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떠났다. 그러다 그의 명석함을 눈여겨본 매형의 권유로 보령 한 탄광의 현장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탄광에 머물다 한 달에 2, 3차례 집에 들르곤 했다. 그래도 두 딸은 아버지의 부재를 잘 느끼지 못했다. 영혜 씨는 “마음이 꽉 찬 느낌이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올 때마다 두 딸과 ‘이벤트’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호롱불로 벽에 붙은 세계지도를 비추고 일본식 영어발음으로 지명과 인명을 말하며 제2차 세계대전 이야기를 해줬다. 두 딸을 앉혀놓고는 두 손으로 강아지, 독수리, 꽃 같은 모양을 만들어 벽에 비추는 그림자놀이를 보여줬다. 일제의 교육은 시킬 수 없다는 가문의 고집으로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마쳤지만 한학에 조예가 깊은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한문 실력으로 ‘명심보감’을 읽어줬고, 붓글씨를 가르쳤다.

손재주가 빼어났던 아버지가 그림을 몇 장 그려 벽장에 붙여 놓으면 두 딸은 방바닥에 배를 깔고 베껴 그렸다. 일기를 쓰게 한 것도, 주산을 배워준 것도 아버지였다. 시간이 나면 두 딸은 아버지 손을 양쪽에서 붙잡고 산책을 즐겨했다.

가족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삼양동, 창신동 같은 달동네에서 살았다. 거적때기를 문으로 삼는 집들이 여기저기 있던 동네 이웃에서는 “너 죽네, 나 죽어” 하는 악다구니와 주먹질이 빈번했다. 그런 곳에서도 아버지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손수 김밥을 말아 도시락을 만들어 화판을 든 두 딸과 소풍을 갔고, 어린 시절 영혜 씨의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냥 순한 것만은 아니었다. 자매가 중고교에 다닐 때는 손에 든 적이 거의 없었지만 회초리가 항상 벽에 걸려 있었다. 경혜 씨는 초등학교 시절 동네 친구와 인근 산에서 해가 저물도록 놀다 늦게 돌아온 적이 있었다. 크게 노한 아버지는 종아리를 10대 때리고는 울며 잠든 큰딸의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었다.

경혜 씨는 말한다. “아버지를 미화하려는 게 아니에요. 사업에 실패하고, 하려는 일이 뜻대로 안 돼 힘들어하며 만취해서 들어오시던 기억도 생생해요. 그런데도 나는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영혜 씨도 말한다. “쌀이 떨어진 날도 많았고, 학교에서 돌아올 버스비가 없는 날도 많았는데 힘들었다는 기억이 없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 충만한 믿음과 배려

영혜 씨가 대학 4학년 때였다. 서울대 사범대 영어교육과를 다니던 그는 졸업하면 바로 교사가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영혜 씨가 사회학과 대학원을 가고 싶어 했고, 교사가 되지 않으면 교원자격증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영어교사는 여성으로선 최고의 직업이었다. 주위에서는 교사를 하면서 대학원 준비를 하라고 했지만 영혜 씨는 배수의 진을 친다는 심정으로 공부하고자 했다.  
▼ 외출한 어머니 돌아오실땐, 마중가서 함께 오셨죠 ▼

1980년 2월 한경혜(왼쪽), 영혜 교수의 졸업식 때 두 사람이 서울대에서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경혜 씨는 석사, 영혜 씨는 학사 졸업이었다. 한경혜 교수 제공
1980년 2월 한경혜(왼쪽), 영혜 교수의 졸업식 때 두 사람이 서울대에서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경혜 씨는 석사, 영혜 씨는 학사 졸업이었다. 한경혜 교수 제공
당시는 건강이 좋지 않던 아버지를 위해 공기 좋은 경기 수원시로 집을 옮긴 지 몇 해가 지났을 때였다. 아버지가 조금 건강이 나아져 직장도 잡았지만 집안 형편이 크게 나아지진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둘째의 결심에 “하고 싶은 대로 하려무나”라고 했을 뿐 어떤 토도 달지 않았다. 영혜 씨는 “그저 자식을 절대적으로 믿고 편들어주셨다”고 했다.

이들이 살던 동네에서 아버지는 ‘밤마다 딸들을 마중 나가는 남자’로 유명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15분가량 걸렸다. 산 밑의 동네로 이어지는 꼬불꼬불하고 어두운 골목길은 여성이 혼자 다니기 쉽지 않았다. 대학신문 기자에 아르바이트, 동아리 활동까지 하던 두 딸은 막차를 타고 통금시간 직전에 도착한 적이 많았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정류장 옆 약속 장소인 문방구에서 기다렸다. 먼저 오는 딸을 집에 데려다 놓고 또 기다리러 나왔다. 귀찮을 만도 한데 불평 한마디 없었다. “왜 늦었느냐” “여자니까 일찍 다녀라”라고도 하지 않았다. 딸들이 늦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희를 못 믿어서 마중 나오는 게 아니다. 사회가 워낙 험하니 사회를 믿지 못해서 그렇다”고 한 번 말한 게 전부였다.

영혜 씨 뒤로는 자식이 없었다. 당시 한국 가정의 평균 자녀 수는 6명. 남아선호가 여전하던 때에 달랑 딸 둘이었다. 친척들은 “없는 처지에 계집애들을 뭣 하러 대학까지 보내느냐”고 했지만 아버지는 끄떡하지 않았다. 평생 아버지는 “아들이 없어서 어떻다”든지, “여자라서 너희가 그렇다”든지, “내가 너희를 어떻게 키웠는데…” 같은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너희가 아들을 대신해야 한다”거나 “집안이 어려워 너희에게 미안하다”거나 “너희가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오롯이 두 딸을 믿고 지긋이 지켜볼 뿐이었다.

경혜 씨는 “자식을 믿는 건 부모의 교육수준하고 상관없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아버지는 자매가 결혼해 분가한 뒤에도 우렁각시처럼 슬며시 두 딸의 집을 찾았다. 하루는 경혜 씨 집에 들른 아버지가 당시 고교생이던 외손자를 찾았다. 경혜 씨가 “도서관 간다는데 모르죠, 지가 어디를 갔는지”라고 하자 아버지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부모가 자식을 못 믿으면 어떻게 하느냐.”

물론 왜 불안과 걱정이 없었을까 싶다. 두 딸이 등록금을 제때 내지 못해 중간고사를 치르지 못하게 되거나, 수학여행을 제대로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작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매 앞에서 그런 불안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를 두 딸에게 어떤 형태로든 떠넘기려 하지 않았다. 영혜 씨는 “아버지는 사랑으로 우리의 정신세계를 안정되게 만들어주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부인에 대한 지극한 사랑도 있었다.

○ 좋은 남편이 좋은 아버지


충남 청양이 고향인 아버지는 보령에서 태어난 어머니 이미형 씨(80)와 1954년 결혼했다. 아버지는 결혼 전 군대에 복무할 때 앨범을 만들어 선물할 정도로 낭만적이었지만, 어머니 이 씨가 “나는 네 아버지가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았다”고 술회할 정도로 가부장적인 면도 있었다.

아버지의 삶은 평탄치만은 않았다. 막내로 태어나 7세 때 어머니를 잃었고, 정치에 뜻을 둔 아버지 때문에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그럼에도 “가족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도 못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사랑이 많을까”라고 어머니가 찬탄할 정도로 부인을 아꼈다. 영혜 씨는 “아버지는 엄마를 꿀단지처럼 보살폈다”고 했다. “내 몸이 귀찮으면 남의 몸도 귀찮다”며 물 떠오라는 심부름조차 시키지 않았다. 술에 만취해서 들어온 다음 날에도 오전 5시에 일어나 마당을 쓸고, 마늘 까기 같은 집안일을 하기도 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다. 어머니는 두 어린 딸을 업히고 걸리고 하면서 기저귀가방을 들고 친정으로 갔다. 상을 치르고 뒤처리를 하던 부인에게 아버지는 편지를 썼다. ‘쌓아놓은 연탄 위에 놓은 경혜, 영혜의 신발을 보니 모두 보고 싶소.’ 올라온다는 전갈이 오자 아버지는 전화를 걸어 “몇 시에 출발하는 열차를 뒤에서 몇 칸째에 타라”고 말했다. 돌아오는 날 아버지는 영등포역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다 얼른 열차에 올라타 아이와 가방을 받았다. 집에 와보니 어떻게 구했는지 사골국이 설설 끓고 있었다.

직장이 없어 이 일, 저 일을 하고 다니던 아버지였지만 부인에게 단 한 번도 “돈 벌 궁리를 해보라”는 말이 없었다. 나가서 일을 한다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한때 어머니가 몇 푼이라도 벌어볼까 해서 동네 빨래공장에서 염색한 기성복을 세탁하는 허드렛일을 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아침 일을 마치고 집에 점심을 먹으러 와보니 방에는 라면 한 봉지와 편지가 놓여 있었다. ‘여보, 일이 있어 나가오. 라면이라도 삶아 드시오.’

이렇게 사는 부부 사이에 큰 소리가 날 일은 거의 없었다. 어머니도 “저 양반 때문에 내가 못살아”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없다. 가정은 화목했다. 자연스럽게 자매도 집안형편 때문에 부끄러워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한 번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튀김 노점을 했다. 자매는 학교가 파하면 교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와서 도왔다. 남루한 단칸 셋방에 친구들을 데려오는 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부유했던 손위 고모는 이런 광경을 보고 “너희들 똑똑하다더니 영 헛똑똑이다. 창피한 것도 모르다니”라며 웃었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된 40대 후반 다시 직장을 얻었던 아버지는 1990년대 중반 자기 이름으로 된 25평형 아파트를 장만했다. 퇴직한 뒤에는 집 뒤에 있던 아주대와 경기대 캠퍼스를 부인과 걸어 다녔다. 부인이 출타를 하고 돌아올 때면 아파트 현관에서 몇십 m 떨어지지 않은 버스정류장에 나와 항상 기다렸다. 어머니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자신이 자판기에서 커피도 뽑을 줄 모르며 은행에서 공과금을 어떻게 내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다 아버지가 하던 일이었다.

○ 고맙습니다, 그립습니다

아버지는 2008년 말 암 판정을 받았다. 딸들이 아버지를 좋다는 병원으로 모시고 다니며 여러 가지 검진을 받게 했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내 몸이 어떻다고 하느냐” “무슨 암이냐”라며 묻지 않고 딸들 하자는 대로 묵묵히 따랐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던 때 아버지는 병상에서 자매를 보고 말했다. “너희 자매는 참 좋았다.” 경혜 씨가 말했다. “아버지가 참 좋은 아버지시죠.” 아버지가 말했다. “어느 부모가 그걸 안 하겠느냐.” 그렇게 작별은 시작됐다. 의식이 돌아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침상맡에 있던 경혜 씨를 보더니 굉장히 정중하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머니는 두 딸에게 남편의 묘비명을 맡겼다. 자매의 머릿속에 바로 떠오른 단어는 ‘사랑’이었다. ‘아버지의 큰 사랑이 그립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떠났고 영원히 두 딸의 가슴에 남았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 한경혜 교수는…
·서울대 농대 가정학과 졸업(학·석사)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박사(가족 및 인간발달학 전공)
·현 서울대 생활과학대 소비자아동학부 가족아동학전공 교수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역임
·한국노년학회 이사  

■ 한영혜 교수는…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 석사
·일본 쓰쿠바대 사회학 박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국제학과 교수
·서울대 일본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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