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 서예가 묘비, 5년 걸린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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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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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중 김충현 선생 2006년 별세 뒤
“거장 족적 담긴 비문 짓기 어렵다”

일중 선생 묘비 뒷면과 옆면에 적힌 비문 일부. 네 면에 적힌 한자와 한글은 각각 예서체와 훈민정음판본체로 모두 3000여 자에 이른다.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 연구실장이 비문을 짓는 데 석 달이 걸렸다. 일중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일중 선생 묘비 뒷면과 옆면에 적힌 비문 일부. 네 면에 적힌 한자와 한글은 각각 예서체와 훈민정음판본체로 모두 3000여 자에 이른다.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 연구실장이 비문을 짓는 데 석 달이 걸렸다. 일중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서예가 고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의 묘비 제막식이 지난달 30일 경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그의 묘에서 열렸다. 일중은 한글 훈민정음판본체와 궁서체를 개발 및 보급했으며 경복궁 건춘문(建春門) 현판과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백범 김구 선생의 비문을 쓴 당대 최고 서예가다. 제막식을 지켜보는 일중선생기념사업회 회원들의 눈빛에는 슬픔과 ‘안도감’이 교차했다. 그동안의 우여곡절 때문이다.

일중은 2006년 11월 19일 향년 85세로 별세했다. 그가 대표로 있던 백악미술관과 문하생들이 모여 발족한 기념사업회가 본격적으로 묘비 제작에 들어간 것은 4년 전인 2007년. 사업회는 장례를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문 글자를 쓸 서예가로 고인의 수제자인 초정 권창륜 씨(68)를 선정했다.

문제는 비문 문장이었다. 사업회는 일중과 오랜 시간을 함께한 지인들 가운데 한문과 우리 고문에 능한 전문가를 선정해 비문 집필을 부탁했다. 부탁을 받은 당사자는 “매우 영광”이라며 흔쾌히 수락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번복했다. “영광이긴 한데 어렵다”는 것이었다.

사업회는 이후에도 몇 명의 한문학자에게 의뢰했지만 대부분 ‘심리적 중압감’과 ‘바쁜 일정’을 이유로 거절했다. 결국 3년여를 표류하던 비문 작성은 지난해 봄에야 완수할 수 있었다.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 연구실장이 작성을 수락한 지 석 달 만에 결과물을 내놓은 것이다.

완성된 비문은 한자와 한글을 합쳐 모두 3000자에 이른다. 전면은 일중의 이름과 그를 치하하는 말을, 나머지 세 면은 그의 전 생애를 담았다. 최 실장은 “우리 역대 비문을 다 섭렵하고 수차례 남의 비문을 써보기도 했지만 이런 대가의 비문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 생애를 넣으면서 가치평가도 해야 하고, 아름다운 문장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고충을 전했다.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정주성 백악미술관 관장은 “당대 최고 서예가의 비문이어서 누가 지었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기 때문에 비문 작성 부탁을 받은 사람들의 부담이 매우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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