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이 본 조선통신사의 모습 ‘필담창화집’ 번역해보니…

  • 동아일보

“조선 문물 최고” 겉으론 극찬
“문장 고루하다” 속으론 혹평

1711년 제8차 조선통신사 행렬을 묘사한 그림의 일부분. 일본인의 시각에서 조선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당시 조선통신사는 수행원까지 포함해 1000여 명이 움직였다. 사진 제공 랜덤하우스코리아
1711년 제8차 조선통신사 행렬을 묘사한 그림의 일부분. 일본인의 시각에서 조선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당시 조선통신사는 수행원까지 포함해 1000여 명이 움직였다. 사진 제공 랜덤하우스코리아
일본 사람이 조선 사람을 인터뷰했다. 인터뷰 내용은 막부의 성이 있던 에도, 일왕이 살던 교토와 나고야, 오사카 등에서 책으로 출판돼 일본 전역으로 팔려나가거나 필사해 소중히 보관됐다. 조선통신사 필담창화집(筆談唱和集) 얘기다.

필담창화집은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행차할 때 인근 지역 학자, 승려, 의원이 조선인과 한문으로 필담한 내용, 주고받은 그림이나 글을 묶은 책을 말한다. 조선인이 쓴 사행록과 더불어 조선통신사 연구의 주요 자료로 꼽힌다.

○ 원고지 3만1000여 장…해외 뒤져 찾아내

그동안 일부만 단편적으로 소개됐던 필담창화집 178책이 현재 번역 완료를 눈앞에 두고 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하우봉 전북대 사학과 교수, 진영미 김형태 김유경 강지희 김정신 구지현 연세대 연구교수 팀이 2008년 7월부터 작업해온 결과다. 번역된 분량은 200자 원고지로 3만1000여 장. 데이터베이스화도 진행 중이다. 관련 논문 30여 편도 별도의 책으로 묶어낼 계획이다.

필담창화집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부터다. 한국 국립중앙도서관 외에도 일본 각지 도서관을 샅샅이 뒤졌다. 해외에 반출된 경우도 많았다. 중국은 물론이고 미국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서관에서도 찾았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개인적으로 간직하던 책이 경매에 나오기도 한다. 번역 과정에서 50여 책이 추가로 발견돼 번역을 위해 다시 연구비를 신청할 예정이다.

○ 일본인 시각에서 본 조선

“내가 조선인이 문장 짓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니 …한결 같이 사승을 지켜 다시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고루함이 심함을 고금 필담을 열독하면 알 만하다.”

1764년 출판된 필담창화집 ‘양호여화(兩好餘話)’에 실린 일본 유학자 오쿠다 쇼사이(奧田尙齋)가 적은 발문의 일부다. 허 교수는 “조선 입장에서 쓴 사행록에는 일본의 시각이 드러나지 않는다. 당시 일본인은 직접 대면한 자리에서는 조선의 문물을 극찬하면서도 막상 책을 펴낼 때는 조선을 고루하다고 비판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1607년 1차 사행부터 1811년 마지막 12차 사행까지 출판 기간이 200여 년에 걸쳐 있어 이 기간 한일 교류 변화상도 연구할 수 있다. 구 교수는 논문 ‘통신사를 통한 한일 문학교류의 전개 양상’에서 필담창화집을 통해 한일 문사 간 교류를 살폈다. 구 교수는 “본격적인 한일 문사 교류는 7차 사행에서 시작됐다. 이 시기 들어 일본 내 한문학적 소양을 지닌 문사계층이 어느 정도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의원필담만 40여 종…다양한 분야 담아

필담창화집이 주목받는 이유는 역사의식, 문장론, 풍습, 의술, 관상, 외교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의원필담을 담은 책은 40여 종에 이를 정도다. 김형태 교수는 “당시 의원들은 전문지식을 갖춘 계층이었다. 인삼재배법이나 약초의 효능, 전염병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눈 만큼 의학에 한정되지 않는 방대한 박물학적 지식의 교류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다산 정약용, 이덕무 등 당대 지식인은 일본 문학이나 학문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도 이 시기 한중교류에 비해 한일교류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며 “필담창화집 번역은 이 시기 동아시아 교류사를 연구하는 데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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