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해설이 있는 클래식’ 덕분에 음악회 가는게 재밌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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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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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래식 읽어주는’ 마리아 칼라스 홀 - 풍월당 가보니

음악평론가 장일범 씨가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마리아 칼라스 홀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오페라 강좌’를 하고 있다. 장 씨가 등지고 선 화면에서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이 나오고 있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음악평론가 장일범 씨가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마리아 칼라스 홀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오페라 강좌’를 하고 있다. 장 씨가 등지고 선 화면에서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이 나오고 있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요즘 해설을 곁들인 클래식 음악 강의와 공연이 부쩍 많아졌다. 명반조차 좀체 팔리지 않는 척박한 한국의 음악 풍토에서 뜻밖에도 클래식에 대한 향학열이라니. 클래식 음악을 배우려는 직장인과 주부들의 진지한 눈빛에선 구도(求道)의 염원마저 느껴졌다.

온통 의문이었다. 왜 클래식 음악일까? 배가 따뜻해지니 고매한 정신을 추구한다? 글쎄. 각박한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 그럴 수도. 그렇다면 왜 굳이 해설까지 찾아 들을까?

누군가는 말했다. “문화는 ‘세속 종교’라잖아요. 사람들이 주일마다 예배당에 가서 기도하는 것처럼 충실하게 참여하는 여가인 거죠.”

또 다른 음악계 인사는 좀 까칠했다. “시장이 형성된 겁니다. 클래식 음악의 수요자와 대중에게 쉽게 클래식을 가르치는 공급자의 이해관계가 만난 시장…. 단 너무 판타스틱하게만 보면 안 돼요. 스스로 음악을 골라 듣는 능력을 키우지 않고 해설만 쫓는 사람도 있으니.”

어쨌든 의문을 풀어야 했다. 장안에 소문난 ‘클래식 읽어주는’ 두 곳을 찾아갔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마리아 칼라스 홀’과 강남구 신사동 클래식 음반 전문매장 ‘풍월당’이다.

○ 왜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는가

지난달 24일 마리아 칼라스 홀은 고급 클럽의 분위기였다. 담백한 디자인의 ‘에르메스’ 볼리드 가방을 들거나 귀부인 같은 모자를 쓴 여성들이 속속 들어왔다. 20대 딸과 함께 온 멋쟁이 40대 엄마도 있었다. 주로 40, 50대인 여성들의 차림새와 태도에는 기품이 흘렀다.

올해 9월부터 연말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3∼5시에 진행되는 ‘장일범의 오페라 강좌’를 찾아온 ‘학생’들이었다. 유명 오페라를 전문가 해설과 함께 감상하는 수강료는 10회에 40만 원. KBS 1FM(93.1MHz) ‘장일범의 가정음악’ DJ로 청취자들에게 친숙한 음악평론가 장일범 씨가 무대에 섰다.

“자, 오늘은 작곡가 조르주 비제의 ‘카르멘’으로 여행을 떠나볼까요?”

강의 자료에는 이 오페라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집시 처녀 카르멘, 젊은 하사관 돈 호세, 그의 참한 약혼녀 미카엘라, 투우사 에스카미요의 ‘사각 관계’라고나 할까. 영국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 코번트가든 실황 DVD(안토니오 파파노 지휘)를 감상하는 중간 중간에 장 씨가 해설을 했다.

“카르멘 역의 가장 큰 특징은 소프라노가 ‘프리마돈나’를 맡는 다른 오페라와 달리 메조소프라노가 맡는다는 점이죠. 그래서 카르멘은 강렬한 팜 파탈의 매력을 내뿜습니다. 이 세상 남자들은 늘 고민이랍니다. 어떤 때는 카르멘 같은 여자가 좋고, 어떤 때는 미카엘라 같은 여자가 좋으니까요. 그리고 돈 호세 역의 요나스 카우프만, 참 잘생겼죠? 요즘 독일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유대계 테너랍니다.”

공연 보며 해설 들으니 귀에 쏙… 중년 남녀들 클래식의 마력 속으로
서울 강남구 신사동 클래식 음반 전문 매장인 ‘풍월당’에서 이 매장 박종호 대표가 클래식 음반을 살펴보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서울 강남구 신사동 클래식 음반 전문 매장인 ‘풍월당’에서 이 매장 박종호 대표가 클래식 음반을 살펴보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집시 처녀 카르멘과 젊은 하사관 돈 호세의 이중창 ‘세기디야’가 나왔다. 카르멘이 빨간 드레스를 걷어 올리며 돈 호세를 유혹하는 노래다. “내 친구 릴리아스 파스티아의 선술집에서 세기디야를 추고 만자니야를 마실 거예요. 그러나 혼자서는 지루해요. 진정한 즐거움은 두 사람이 나누어 갖는 것.” 평소 귀에 익었던 선율인데도 이날따라 가슴에 다가와 끈끈하게 달라붙는 듯했다. 웬일일까. 겨울을 타나? 아니면 카타르시스?

강의 중간 휴식 시간에 수강생들에게 물었다. 왜 클래식 강의를 듣느냐고.

“아이들 다 키워 학교에 보내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어요.” “클래식 책을 많이 읽었지만 그때뿐이었어요. 공연을 보면서 해설을 들으니 뇌리에 쏙 들어오고 음악회에 가도 재미가 생겨나요.” “오페라엔 가슴 뛰는 사랑이 있잖아요.”○ 배움과 사교가 만난 문화 공간

오후의 오페라 강좌에 이어 저녁엔 같은 공간에서 해설이 있는 클래식 공연이 열렸다. 서강대 최고경영자과정(STEP) 34기가 이곳을 빌려 부부 동반 송년 음악회를 즐긴 것이다.

마리아 칼라스 홀은 윤재훈 대웅제약 부회장이 대웅상사 사장 시절이던 2007년 문을 연 살롱 스타일의 소규모 공연장이다. 윤 부회장은 이곳에 국내외 정상급 연주자들을 불러 모아 공연을 펼쳐왔다. 연주자의 작은 숨소리마저 들릴 듯 무대가 가까워 타임머신을 타고 옛 유럽의 살롱 음악회에 초대받은 기분이 든다.

이 곳은 개인과 기업을 대상으로 3시간에 80만∼120만 원에 대관(공연비는 별도)도 한다. 국내 금융권의 VIP 고객 초청 모임 또는 대학의 최고경영자 과정 동문회 등이 자주 열린다. 와인과 이탈리아 음식, 클래식 DVD를 트는 대형 화면이 어우러진 1층 ‘카페 M’에서 식사를 한 뒤 아늑한 지하에서 해설이 있는 공연을 관람하는 순서다. 휴식시간엔 연주자들과의 사진 촬영 순서도 있다. 현대카드는 올해 4∼9월 매월 한 차례 이곳에 임직원 60여 명을 초대하는 ‘컬처 콘서트’도 열었다. 직원들의 문화적 소양을 길러주기 위해 음악 칼럼니스트 정지훈 씨, 현악 사중주단 ‘콰르텟 엑스’의 리더 조윤범 씨 등이 해설이 있는 공연을 했다.

마리아 칼라스 홀의 음악감독인 장일범 씨는 윤 부회장과 친척 사이다. 러시아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에서 성악을 공부한 후 1999년 아트선재센터와 함께 기획했던 ‘이야기가 있는 음악회’가 크게 히트해 클래식 해설자의 길을 걷게 됐다. 동글한 외모와 미성(美聲), 빼어난 패션감각과 배우 기질로 ‘클래식계의 만능 엔터테이너’란 수식이 붙었다.

그는 올해 4∼10월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8차례에 걸쳐 ‘클래식 카페’라는 해설이 있는 공연도 이끌었다.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 아르헨티나 탱고 등 나라별 음악을 소개한 시도였다. 이 중 러시아를 주제로 열렸던 10월 공연이 지금도 기억난다. 당시 빨간 구두와 털모자 차림으로 해설을 하다가 러시아 민요까지 부르는 그를 봤을 때 클래식이 친구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클래식이 어렵다고요? 일단 무조건 틀어놓고 공연장도 자주 다니면서 ‘음악의 살’을 붙여 나가세요. 그러다 마음에 드는 음악가나 곡이 나오면 ‘위키피디아’도 검색해 보시고요. ‘파바로티: 나의 인생 나의 노래’처럼 음악가들의 자서전을 읽으면 무대 뒤 메커니즘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클래식에도 트렌드가 있답니다. 요즘 어떤 연주자가 뜨는지 관심을 가지면 그가 연주하는 곡도 자연스레 궁금해질 겁니다.”

○ 황무지 클래식 풍토의 개척자

박종호. 이제 그의 이름 석 자는 꽤 유명해졌다. 40대 초반이었던 2003년 정신과 의사란 본업 대신 ‘풍월당’이란 클래식 음반 전문매장을 열 때만 해도 “과연 얼마나 버틸까”란 게 주위의 시선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불멸의 오페라’, ‘박종호에게 오페라를 묻다’ 등 클래식과 오페라 관련 서적을 쉼 없이 펴내며 황무지 같던 클래식계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2년 전부터는 단순히 음반가게가 아니라 클래식 문화 콘텐츠 기업을 표방한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마리아 칼라스 홀’에서 일반인 수강생들이 클래식 음악 수업을 앞두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서울 강남구 대치동 ‘마리아 칼라스 홀’에서 일반인 수강생들이 클래식 음악 수업을 앞두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이곳의 클래식 음악 교육프로그램인 ‘풍월당 아카데미’에는 ‘월요 오페라 포럼’(12강의에 60만 원), ‘명곡 백선’(13강의에 29만 원, 개별 강의는 2만5000원) 등 여러 강좌가 열리고 있다. 유럽의 음악 축제를 가보고 싶어 하는 수강생을 위한 해외여행 프로그램도 있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뿐 아니라 대학 강사, 지방에 사는 주부도 온다.

이색 경력은 수강생뿐 아니다. ‘말러 탄생 150주년 특집 말러 전곡 강좌’를 강의하는 김문경 씨는 특허청 사무관, 오페라 기초를 가르치는 유정우 씨는 피부과 의사다.

지난달 26일 찾아간 박종호 씨의 ‘명곡 백선’ 강의는 핀란드의 국민 음악가인 장 시벨리우스(1865∼1957)의 대표곡 세 곡을 두 시간 반 동안 DVD로 들으면서 해설을 듣는 프로그램이었다. 강의실은 87명의 수강생으로 빈 자리 없이 꽉 찼다.

“시벨리우스가 굉장히 옛날 사람 같죠? 아닙니다.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형뻘이셨죠. 60세에 은퇴해 92세까지 핀란드의 ‘살아있는 무형문화재’ 대접을 받으며 사셨습니다.”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op.47을 연주한 공연 두 개를 DVD로 비교해 감상하는 맛은 그중 백미였다. 막심 벤게로프(바이올린)와 다니엘 바렌보임(지휘, 시카고 심포니), 발레리 소콜로프(바이올린)와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지휘,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연주 궁합은 확연히 느낌이 달랐다. 전자가 두 음악 천재의 광기의 변주라면, 우크라이나 출신의 촉망 받는 바이올리니스트 소콜로프의 연주는 참신하면서도 믿음직스러웠다.

이 밖에도 길 샤함, 정경화 등의 명연이 있지만 슈퍼스타 안네 소피 무터가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과 녹음한 음반은 한시라도 빨리 듣고 싶었다. 박 씨의 이 설명 때문에.

“3악장에서 이 둘의 기가 막힌 호흡은 남녀의 섹스를 절로 떠올리게 해요. 몰아붙이는 듯 열정적이면서도 섬세하다니까요.”

무터는 34세 연상의 프레빈과 2002년 결혼했다가 4년 만에 헤어졌다. 프레빈은 여배우 미아 패로의 전 남편으로 우디 앨런 감독의 부인인 순이 프레빈의 양아버지이기도 했다. 클래식계도 대중문화계 뺨치게 스캔들이 많다. 딱 아는 만큼 재밌다.

○ 에필로그

현대 음악계의 거장 바렌보임이 피아노도 치고 지휘도 하는 공연을 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물었다. “언제 왜 클래식을 듣습니까”라고. “출근할 때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어서”,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고 싶을 때”.

정신과 의사인 박종호 풍월당 대표는 “의외로 많은 사람이 영혼의 정화, 위안과 치료의 목적으로 클래식을 찾는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클래식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 우리에게 유럽 문화의 인프라가 없기에 당연합니다. 그러나 자칫 해설 강의에만 의존하면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지 않고 요약본으로 줄거리만 외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스스로 깊이 음미하며 전곡(全曲)을 들어야 합니다.”

몇 년 전 팔아 버렸던 피아노를 며칠 전 다시 샀다. 꽃그림이 그려 있는 걸로. 원칙 없이 꽂혀 있던 클래식 음반들도 하나씩 꺼내 정리를 했다. 클래식 향학열을 취재하다가 전염이 되었나보다. 어릴 적엔 지긋지긋하던 하농 교습본을 펼쳤더니 단정한 음계들이 “똑바로 살라”고 입바른 말을 해주는 것 같아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녹슨 손가락들이 자꾸 엉뚱한 소리를 내지만 그래도 모처럼 신났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디자인=김원중 기자 paran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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