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즘 소설도 유머 빠질 순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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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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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의 장편 ‘설계자들’ 인터넷 연재 김언수 씨

‘캐비닛’의 작가 김언수(38·사진)를 생각하면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기발한 상상력과 탁월한 묘사력, 그리고 블랙유머가 먼저 떠오른다. 단숨에 잘 읽힌다는 점 역시 이 작가의 미덕이다.

그는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에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가 당선돼 등단했다. 그와 절친한 동료 작가 천명관의 말을 빌리자면 이른바 ‘진골 출신’이다. 2006년 ‘캐비닛’으로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으면서 문단 안팎의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소식이 뚝 끊겨버렸다.

이 작가가 3년여 만에 신작을 발표한다. 최근 문학동네 인터넷 카페에 장편 ‘설계자들’ 연재를 시작했다. 하루치 연재 분량에 댓글이 200여 개 달릴 만큼 독자들의 관심도 대단하다. 그를 18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이 작가의 행보는 독특하다. 대부분의 신춘문예 출신 등단자들은 문예 계간지에 단편을 발표한 뒤 일정 기간 후 단편집을 묶어 낸다. 이런 사례가 관례화돼 공식처럼 자리 잡았다. 그러나 등단한 지 8년이 다 된 그는 단편을 발표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습작기에 단편을 쓰긴 많이 썼어요. 하지만 등단한 이후에는 단편을 내면서 (소설 쓰는) 공부를 계속 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장편에 치중했습니다.”

전영한 기자
전영한 기자
그동안 1500장, 900장짜리 장편 두 개를 버렸다고 했다. 끝까지 쓴 장편이 실패작이라고 여겨 폐기한 뒤 마음의 상처가 컸다. 지난해 말에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통렬한 유머가 번득이는 문장을 보면 쉽게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는 ‘양극성 장애’가 있어 감정 기복이 심하다고 했다. 소설가 박민규, 천명관 등 가까운 동료 작가들이 “쓰기만 하면 된다. 걱정하지 마라”고 격려해 준 것이 큰 힘이 됐다. 올봄 우울증을 떨치고 새롭게 시작한 작품이 ‘설계자들’이다.

‘설계자들’은 ‘암살’을 주문받아 설계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서른두 살 사내인 래생. 암살 전문 기관에서 교육받은 킬러다. 그렇지만 이 킬러는 어리바리하고 인간적이다. 목표물을 눈앞에 두고도 머뭇거린다. ‘적당한 때가 아니다’라며 그 머뭇거림을 자기합리화하는 과정이 웃음을 유발한다. ‘좀 더 가치 없는 인간이 좀 더 가치 있는 인간을 죽이는 비정한 세상’에 대해 말하는 이 소설에서도 김 작가 특유의 날카로운 유머는 그대로다. “유머는 인간에게 문을 열려는 악수 같은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유머란 건 우리 삶 모든 곳에 다 있어요. 만약 리얼리즘 소설에 유머가 없다면, 엄밀히 말해 그건 리얼리즘이 아니죠. 빨치산들은 자기들끼리 농담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작가는 올여름 ‘설계자들’을 단행본으로 묶어낼 계획이다. 차기작 구상도 마쳤다. 중편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의 등장인물과 배경을 바탕으로 한 장편소설이다. 이미 발표한 단편을 장편화해 발표하는 것은 외국에서는 종종 있지만 한국 문단에서는 드문 일이다.

“우울하고 침체된 시기를 거치면서, 소설 쓰기란 휠체어를 앞으로 밀듯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가는 일이구나 하는 걸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진짜 소설가는 ‘쓰는 것’으로 승부하는 사람이란 것도요.”

그의 마지막 말은 앞으로 선보일 새로운 작업들에 대한 다짐으로 느껴졌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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