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인터폰으로도 사랑은 가능할까?

◇ 앨리스의 생활방식/장은진 지음/392쪽·1만2000원·민음사

주변에 늘 있는 이야기보다 지구촌에 ‘적어도 한사람’에겐 있을 법한 얘기를 쓰고 싶었다

한 번도 외출하지 않고 10년 동안 집 안에서만 사는 여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인터폰을 통해서만 사람들과 교류하고, 오로지 말로써 그들을 굴복시키고, 심지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장은진 작가의 장편 ‘앨리스의 생활방식’에선 이런 믿기 힘든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이런 기이한 삶을 사는 한 여자를 조금씩 이해하고 공감해가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25일 오후 서울 세종로 동아일보사에서 만난 작가는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살아갈 수 있다. 타인이 살아가는 방식이 밖에서 보기엔 비정상적으로 보이고 보편적이지 않아 보여도,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그걸 이해해 준다면 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 시대에 “휴대전화를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가지고 다니기도 번거롭고 집전화로도 모든 게 충분하다”고 말하는 작가의 생활방식 역시 일반적이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광주의 자택에서 집필활동과 독서 등에만 몰두 중인 그는 인터뷰를 위해 모처럼 상경했다고 했다.

장은진 작가는 2004년 등단해 소설집 ‘키친 실험실’을 펴냈고 2009년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로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한 주목받는 신인이다. 이번 작품은 첫 소설집에 수록됐던 단편 ‘거울의 잠’에서 ‘인터폰으로 대화하는 이웃’이란 모티브를 장편으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그는 “주변에 늘 있는 이야기들보단, 지구촌에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있을 것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며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TV 프로그램을 보면 별별 이상한 일이 다 나온다.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있을 법하지 않다’는 장담은 누구도 하기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저런 실현 가능성을 떠나서 봐도, 이 작품은 소설로서 재미있다. 톡톡 튀는 설정과 유머러스한 대화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나이 서른에 제 명의의 집을 소유하게 된 번역가 민석은 감동에 젖어 있다. 서울 땅에서 이 나이에 번듯한 제 집을 가진다는 것은 일반인에게 무척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남자에 대해 좀 더 말해보자면, 유년시절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을 독일에서 자라 두 개 언어에 능통한 데다 탁월한 언어적 감각으로 떠오르는 젊은 번역가로서 각광받고 있다. 거기다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이며 ‘한 폭의 그림’ 같은 여자친구 지나와 교제하고 있다. 모든 게 완벽에 가까운데, 앞집에 사는 정체불명의 여자 때문에 그의 평온하던 일상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이사한 첫날,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안녕하세요?” 사람은 없는데 목소리만 자꾸 들린다. “당신 뒤에 있어요.” 뒤를 돌아봐도 아무도 없다. 어딘가에 홀렸나 싶어 어리둥절할 즈음, 앞집 여자가 인터폰을 통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웃이라며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로만 살갑게 구는 여자에게 민석이 묻는다. “우리가 무슨 사이죠?” 여자가 대답한다. “이웃이잖아요.” 그녀는 자신은 ‘앨리스’고 민석은 ‘루이스’라고 마음대로 애칭까지 정해버린다.

이 정도에서 끝나면 괜찮은데 온갖 심부름을 다 시킨다. 건전지를 대신 사달라거나 민석이 번역한 책을 구해 달라고 한다. 부탁을 거절하면 현관문에 난 작은 구멍으로 쇠파이프를 밀어 넣어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문이 부서지도록 쾅쾅 내리친다. 미친 여자가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민석은 때때로 정곡을 찌르는 여자의 화법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다. 이 여자에 대해서는 ‘코끼리’라고 불리는 거구의 아파트 주민이 주는 몇 가지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르면 이 여자는 10년 동안 이 아파트에 살았고, 10년 동안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몇 살인지, 어떤 모습일지, 과연 집 안에서 여자 혼자 살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작품을 후반부까지 봐야지만 조금씩 가닥을 잡아나갈 수 있다.

민석의 절친한 친구이자 연극배우인 수연, 남자라면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절세 미녀 애인 지나, 그리고 자칭 ‘앨리스’인 정체불명의 옆집 여자. 이들의 뒤엉킨 관계와 숨겨진 상처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사람들이 마주하고 있다고 해서 상대에 대해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작가는 오히려 한 번도 만난 적도, 본 적도 없는 관계에서 상대의 진짜 모습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지는 않은지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