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에 기초한 민주공화제 정부, 한민족史의 신기원”

  • 입력 2009년 4월 9일 03시 10분


윤대원 교수 “한성정부계통론은 이승만의 정파적 수단”

서희경 박사 “임정 건국강령, 대한민국에 그대로 연결”

고정휴 교수 “한국 독립 인정받기 위해 외교전도 펼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기념해 한국 중국 일본의 학자들이 참여한 동아시아학술회의가 8일 이화여대 국제교육관 LG컨벤션홀에서 열렸다. 이 학술회의에서 학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현대사적 성찰’이라는 주제를 놓고 논문 발표와 토론을 벌였다. 학자들은 임시정부의 헌법과 임시정부 조직의 변천 과정, 1920년대 초반 총독부의 눈에 비친 임정의 모습, 임정이 벌인 외교적 노력을 조명했다. 이 학술회의는 동아일보 부설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와 이화학술원이 공동 주최하고 이화여대, 동아일보사가 후원했다. 김학준 동아일보사 회장은 축사에서 “3·1운동이 우리 민족에게 남긴 자산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임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울에서 창간된 동아일보였다”며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하신 분들은 한쪽으론 임정, 다른 쪽으로는 동아일보를 염두에 두고 싸웠다”고 말했다.》

김학준 동아일보사 회장은 축사에서 “3·1운동이 우리 민족에게 남긴 자산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임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울에서 창간된 동아일보였다”며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하신 분들은 한쪽으론 임정, 다른 쪽으로는 동아일보를 염두에 두고 싸웠다”고 말했다.

기조연설을 한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는 임정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군주제를 폐지하고 한국 역사상 최초로 헌법에 기초한 민주공화제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한국 민족사에서 신기원을 열었다”면서 “어떤 민족도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결까지 임정을 수립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민족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 상하이 임정과 충칭 임정의 법통론

윤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임시정부 법통론의 역사적 연원과 현재적 의미’에서 상하이 임정의 법통론을 둘러싸고 진행돼 온 논쟁을 소개했다.

윤 교수는 “항일운동시기 ‘법통론’이란 용어가 처음 언급되고 논쟁이 됐던 것은 1921년 2월 박은식 등 14명이 ‘아동포(我同胞)에게 고(告)함’을 발표한 이후인 국민대표회의 시기”라면서 “당시의 최대 쟁점은 상하이 임정의 법통을 인정하느냐였는데 일부에선 국민대표회의의 목적이 ‘법통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 자체임을 강조하면서 법통론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이승만이 ‘국내에서 1919년 13도 대표가 국민대회를 열고 선포했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집정관총재 또는 대통령을 자임한 한성정부는 가공한 정부나 마찬가지였고 한성정부계통론은 이승만이 상하이 임정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이해관계를 관철시켜 나가는 수단으로 활용됐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해방직후 임정지지론의 정치적 성격: 민세 안재홍의 경우’에서 민세의 생각을 통해 임정과 대한민국 정부의 관계를 소개했다. 민세는 총독부에 의해 여운형 송진우 조만식 홍명희 등과 함께 ‘남아 있는 비협력 지도인물 5인’으로 꼽혔다.

정 교수는 “민세는 국내적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선 좌익세력이 통제되고 민족진영이 주도권을 잡는 가운데 통합민주독립국가가 건설돼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이런 비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민세는 충칭 임정의 법통과 존재를 인정하고 충칭 임정이 중심이 돼 건국과정을 이끌어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고 밝혔다.

○ 임시정부 헌법과 대한민국 헌법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에 나타난 정부형태의 변천과 특징’을 발표한 정상우 한국법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임정은 임시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민주공화국 헌정의 시작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1919년의 임시헌장은 3·1운동 정신과 국가형태로서의 민주공화국을 언급했고, 종교 언론 거주이전 신체의 자유, 재산권 등 권리를 규정했다. 정 연구위원은 “이 임시헌장은 1948년 제정된 헌법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세련된 차원에서 작성됐다”고 평가했다.

신용하 교수는 “임정의 마지막 헌법을 제헌의회가 그대로 베꼈는데 사실상 임정의 마지막 헌법이 더 상세하게 많은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팀장인 서희경 박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민주공화주의: 조소앙의 균등이념을 중심으로’에서 “1941년 발표된 임정의 ‘대한민국건국강령’은 1946년 3월 행정연구위원회에 의해 작성돼 건국헌법의 모체가 된 ‘한국헌법’에 그대로 연결됐고 이 헌법의 전문에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라는 대목 등은 제6공화국 헌법에도 그대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 국제 시각을 갖춘 임정의 외교 노력

임정은 수립 초기부터 세계를 향한 외교 노력을 활발하게 펼쳤다. 고정휴 포스텍 교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연맹(LN), 국제연합(UN)에 대한 인식과 가입 교섭’에서 임정의 외교적 노력을 살폈다.

고 교수에 따르면 임정은 1919년 9월 국제연맹에 제출할 목적으로 ‘이에 한인의 입으로 한인의 사정을 세계에 소(訴)하려 하야 창황간에 차고(此稿)를 초(草)함이라. 파리평화회의에 소(訴)하야 패(敗)한 오등(吾等)은 경(更)히 금차의 국제연맹(國際聯盟)에 소(訴)하여야 할지라’는 대목을 명기한 ‘조일관계사료집’을 편찬했다.

임정은 또 1932년 9월 일본의 만주 침공 이후 특명전권수석대표인 이승만과 파리 고려통신사의 서영해를 스위스 제네바에 보내 국제연맹 가맹국 대표들을 상대로 활발한 선전활동을 펼쳤다. 국제연합 창립총회라고도 불리는 샌프란시스코회의 개최기(1945년 4∼6월)에는 충칭 임정과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가 합작해 한국대표단의 회의 출석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신용하 교수는 “임정은 중국 수뇌 장제스와의 외교활동 결과 카이로선언에서 한국 독립을 연합국 수뇌가 세계에 공약하도록 하는 등 외교에 진력했다”고 평가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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