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7>

  • 입력 2009년 1월 28일 13시 47분


나는 숫자다.

인간은 평생 숫자에 갇혀 산다. 때론 불편함을 호소하더라도 기대면 편하고 든든한 것이 숫자다.

그 숫자를 버리고 탈주하려는 인간 역시 적지 않다. 나를 숫자 따위로 규정하지 말라. 난 숫자 이상이다. 로봇은 언제 인간이 되는가. 숫자 이상을 이해하고 의지를 품을 때다.

"사이보그 거리를 즐기시는 줄 몰랐습니다. 전 겨우 23퍼센틉니다만 몇 퍼센트 기계몸이십니까? 무릎 아래는 아는 거고 또 어디어딥니까?"

"비밀!"

"파트너끼리 비밀 따윈 없다고 강조한 분이 누구셨더라. 몇 퍼센틉니까? 30? 40? 혹시 50퍼센트를 넘습니까?"

"넘으면 왜? 숫자 놀음 그만하고 어서 가지."

석범이 토네이도 강철구두를 재게 놀렸다. 이 구두는 100미터를 4초에 주파할 만큼 빠르다.

"같이 갑시다. 같이 가자고요."

석범은 부엉이 모양 건물 앞에서 멈췄다. 뒤따라 달려온 앨리스가 숨을 헐떡이며 부엉이 가슴에 반짝이는 글자들을 읽었다.

"……BoDy BaZaar(바디 바자르)! 이, 인체 시장? 여긴……."

앨리스가 석범 곁에 다가섰다.

"맞죠?"

"뭐가?"

"바디 바자르! 사건번호 35, 클락이 마지막으로 갔던 클럽."

대뇌수사팀은 살인범을 체포한 후 뇌에 담긴 기억을 영상으로 옮겨 저장했다. 재생이 불가능한 부분이 적지 않았지만 흐릿한 장면 하나도 범인의 진술에서 허위를 밝히고 여죄를 추궁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재생한 기억에 따르자면 클락은 출국 전날 바디 바자르에 들렀다. 거기서 밀무역상인 반인반수족(半人半獸族)들을 만났다. 상체는 커튼에 가려 어두웠지만 기계몸 하반신은 각각 원숭이, 말, 개, 소란 걸 쉽게 구별했다. 반인반수는 특별시연합법에 어긋났지만 그들은 법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거래만 성립하면 무엇이든 취급했고 어디든 갔고 누구든 죽였다. 석범이 이 기억 영상을 들이밀자, 침묵으로 버티던 클락도 은초롱뱀을 구입할 수 있을까 기대하고 만났지만 성과가 없었노라 털어놓았다.

"바디 바자르란 클럽이 어디 한두 군데야? 서울특별시만 해도 서른 개가 넘어."

석범이 속마음을 감추고 딴전을 피웠다.

"섭섭합니다. 남앨리스를 파트너로 여기긴 하는 겁니까? 내일 약속도 숨기더니 누굴 바보로 아시나? 저렇게 'D'와 'Z'를 촌스럽게 대문자로 쓴 곳은 여기뿐일 걸요. 아! 또 그 버릇이 도진 거군요. 진범이 잡힌 후에도 범행 과정을 되짚는 짓. 어쩐지 너무 쉽게 야근을 포기하더라 ……아이고 내 신세야. 하나뿐인 파트너가 워크홀릭이니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할 수밖에!"

석범이 댄스홀로 고개를 돌렸다.

손님들은 반복되는 음률에 맞춰 어깨만 살짝살짝 흔들었다. 양팔을 못 펼 만큼 만원이었다.

사이보그 거리에는 범죄가 끊이질 않았다. 그들은 가난하고 외롭고 무엇보다도 아팠다. 기계몸과 천연몸의 완벽한 조화는 아직도 먼 미래의 일이다. 값싼 미등록 재활용 기계몸을 부착한 이들은 열흘에 한두 번씩 접합 부위에서 시작하는 끔찍한 고통을 맛보아야만 했다. 통증을 멈추려면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도둑질이든 강도질이든 살인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20퍼센트가 사이보그의 절대기준은 아니다.

어떤 이는 겨우 3퍼센트 기계몸으로도 자신을 사이보그로 간주했고 어떤 이는 80퍼센트를 기계몸으로 채우고도 사이보그란 단어를 경멸했다.

경계가 모호하니 오해와 불신도 커졌다.

100퍼센트 천연몸을 지닌 인간만이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는 올림픽의 세계신기록부터 의심받았다. 100미터 달리기 기록이 8초대로 진입한 후 신기록을 낸 선수는 병원에서 열흘 꼬박 정밀검사를 받아야 했다. 시합 직전 근력과 순발력을 열 배 이상 끌어올렸다가 배설되어 영원히 사라지는 나노 약물도 적지 않았다. 0.1퍼센트라도 문제점이 적발되면 신기록은 취소되고 선수는 영구 제명을 당했다. 이의신청을 거쳐 법정까지 간 경우만 열두 건이다.

석범과 앨리스도 마주 보고 서서 어깨를 튕기고 돌렸다. 인간에게든 사이보그에게든 음악은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이다. 비트가 빨라지자 어깻짓과 손놀림들이 더 현란해졌다. 그때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철썩 철썩 척 쏴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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